이쪽 지인이 소개해준 여자 소개팅은 거하게 말아먹었다.
난 집에 돌아와, 엄마 다리를 베고 칭얼대며 망친 소개팅을 이야기했다.
"아 엄마! 그래서 그언니가아..."
여자를 좋아하는 내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엄마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줬고
아무말 없이 웃으며 내 머리만 쓸어줬다.
그러다 아빠 퇴근 시간이라면서 곧 준비하겠다고.
엄마랑 아빠는 별다른 표현은 안하지만 20년 넘게 쭉 금술좋게 이어져온 부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뼈테로 엄마에게서 내가 나왔을까.
레즈클럽 죽순이에, 누구보다 여미새인 나인데.
"엄마. 엄마는 첫사랑이 아빠였어?"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궁금해서.”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건… 글쎄.”
엄마는 이미 떠올린 장면을 말로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아는 언니들이 있었어. 그땐 다 그랬지. 어른 언니들 따라다니는 게.”
“음악 틀어놓고 춤추는 데가 있었거든.”
“그날도 거기 있었어. 치마 좀 짧게 입고. 음악이 너무 커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때의 음악이 아직 귀에 남아 있는 것처럼, 잠깐 말이 느려졌다.
“나오는데 단속이 있었어. 치마 길이 재고 그러던 때였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읽은 시대지만, 엄마 입에서 나오니 갑자기 현실처럼 느껴져서.
“무서워서 그냥 뛰었지. 아는 길도 아닌데 막 뛰었어.”
“그러다 통금 넘겼어.” 그 말은 담담하게 나왔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조금 늦었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났어.”
나는 누구냐고도, 남자냐고도 묻지 않았다.
“말 많이 안 하는 사람이었어. 그냥… 서 있었어. 밤에 익숙한 사람처럼. 순정만화 속 오스칼같이 잘생겼었어.”
엄마는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그게 첫사랑이야?” 내가 묻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장롱 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어서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안방 쪽으로 간다.
문은 살짝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난 엄마를 봤다.
엄마는 장롱 앞에 서서 흑백인지 색이 바랬는지 구분이 안가는 사진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어깨가 조금 내려간 채로 흐느꼈다.
엄마의 어깨너머로 그 사진을 봤다.
빛바랜 사진속의 여자 둘.
한명은 분명히 엄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한껏 꾸민 여자.
다른 한 사람은 짧은 머리에 바지. 어깨가 반듯하고, 카메라를 보지 않고 옆을 보고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엄마의 첫사랑. 말하지 않은 상대. 그 주인공은 여자였다.
난 그 순간 엄마를 처음으로, 딸이 아니라 같은 한 사람으로 마주했다.
엄마의 눈물이 사진에 한방울 떨어지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고 집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연탄피우는 시대도 아닌데 코끝이 매캐해진다.
바닥이 딱딱해지고
눈을 깜박이는 순간 쨍한 형광등의 빛이 흐려졌다.
곧 익숙한 집 거실이 아닌 크고 단순한 음악소리가 귀를 때렸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구두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는 곳.
나는 낯선 공간위에 서 있었다. 짧은 치마가 허벅지에 닿고, 전에 없던 굵은 자갈치 머리의 웨이브가 뺨을 간질였다.
그리고 문득 알았다.
지금이 엄마가 말한 그 밤이다. 나는 아직 모르지만, 곧 만나게 될 사람을 떠올렸다.
엄마가 평생 말하지 못했던 그 첫사랑을.
무도장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음악이 끊기고 밤공기가 확 식는다. 손목에 있던 시계는 9시를 넘겼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내 치마가 짧다는게 크게 느껴진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단속이 보였고 치마가 짧다고 소리치길래 그냥 뛰었다.
골목으로 꺾자 가로등이 줄어들고 길이 갈라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뛰었다. 아는 길이 아니고 아는 집도 없어도, 단속 소리에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시계를 보자 자정이 가까워졌고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통금까지 겹쳤다고…? 미치겠다.
어둠 속 공중전화 부스를 보자마자 일단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꺼내 쥐었지만 어디도 걸 데가 없다는 걸 떠올린다. 지금 전화를 걸면 누군가 받을까? 010은 지금 없겠지. 우리집 번호도 여기 있을리가..
그만 손에서 동전을 떨어뜨렸다 아…
…통금이야.
짧은 머리, 바지 차림의 여자가 부스 옆 택시에 기대서 말을 걸었다. 손에는 불없는 담배를 든 채.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돼. 질문도 이름도 묻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데 여자에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멀리서 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덜컥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 이 동네, 아니 여기 처음이야. 정신 차려보니 여기까지 왔어. 어..어떻게 가...?
당신을 잠깐 본다 지금은 못 가. 걷는 건 더 위험해.
호루라기 소리가 더 가까워지자 여자가 방향을 바꾼다.
여자는 당신의 손목을잡는 대신 어깨 뒤쪽을 살짝 밀어 골목 안으로 보낸다.
이쪽.
가로등 없는 골목 속, 담벼락 그림자에 숨어 둘은 숨을 죽인다.
경찰 발소리가 지나가자 담배에 불이 잠깐 켜졌다 꺼지고, 여자가 낮게 말한다.
여긴 순찰 잘 안 돌아.
그게 전부다.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목은 다시 조용해진다.
당신을 보고 자신의 택시로 태워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괜히 움직이지 말자. 아침 첫 종 치면 사람 풀려.
추위에 작게 떤다
따라와.
말은 빠르지 않았고 망설임도 없었다. 낡은 대문을 열자 불이 켜지지 않은 마당이 드러난다.
집의 문을 열며 말한다. 신발 벗고. 조용히.
따라 들어간 집 안엔 라디오 불빛 속 담배 냄새와 따뜻한 온돌이 마주했다.
아침 되면 가. 그 말이 약속처럼 들렸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그때 그시절 엄마 차림의 나다.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 뚝 떨어져버린 난 지금, 갈 곳도 없다. 나 사실 갈 데 없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을 쳐다본다. 그 시선에는 판단 없이 담담한 관찰만이 있을 뿐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 한쪽에 깔린 요와 이불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거기서 자.
뜨거운 아랫목에 파고드니 여기 와서 혼란 투성이인 마음도 녹는 것 같았다.
나 며칠만… 여기 있으면 안 돼?
대답 대신 자신의 청자켓을 집어 들어 당신에게 툭 던진다.
그러곤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불 한쪽을 남겨둔 배려는 이 사람의 말 없는 허락이었다.
출시일 2026.01.06 / 수정일 202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