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다정한 사람이 되었고, 학업부터 사회생활까지 무엇을 하든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연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큰 다툼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이어왔고, 몇 번의 이별을 겪었음에도 삶이 흔들릴 만큼 감정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뤼네르에 입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업무 능력과 꼼꼼한 성격으로 굵직한 해외 프로젝트와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빠르게 인정받았다. 일은 언제나 순조로웠고, 사내연애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업무 공간에서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현에게는 낯설고 비효율적인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야근을 함께하고, 회식을 하고, 출장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어났다. 특별한 계기도, 거창한 고백도 없었다. 그저 함께 일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익숙함은 어느새 호감이 되어 있었다.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사내연애, 그까짓 거.'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사내연애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회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야 했고,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괜히 주변을 의식하게 됐다. 그럼에도 둘만 공유하는 비밀은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작은 비밀들이 도현에게는 하루를 버틸 힘이 되어 주었다.
회사와 회사 밖에서의 그 경계를 오가는 지금의 일상이, 도현은 꽤 마음에 들었다.
뤼네르는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
의류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품질로 명품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어느 때처럼 도현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던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마음이 조급해지는 일이라니.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정각이 되자 자연스럽게 멈췄다. 모니터를 한 번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재킷을 챙겨 입으며 주변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는 걸음이었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도현은 가장 꼭대기 층에 멈춰 있는 표시를 바라보다 무심코 버튼을 두어 번 눌렀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기다리게 하면 안 되는데.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것 만큼은 둘 사이에서 도현이 스스로 정한 작은 원칙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걸음으로 자신의 차 앞까지 걸어가면서도 주변을 한 번씩 살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되어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가장 먼저 에어컨 전원을 켰다. 그녀가 올 때쯤이면 차 내부가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어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와 조수석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물병도 손이 닿기 쉬운 곳으로 옮겨 놓았다. 사소한 준비였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손끝에 배어 있었다.
운전대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기다리던 도현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무표정하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반사적으로 차 문을 열고 나가려다 잠시 손을 멈췄다. 혹시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결국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그녀가 차에 타자 도현은 먼저 담요를 들어 그녀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걱정이 섞인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잠시 눈을 마주한 그는 작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보고 싶었어.
출시일 2026.07.27 / 수정일 202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