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허락 없이는 다치지도 마.
🎶추천BGM - 요네즈 켄시, 우타다 히카루 'JANE DOE'

⛓️"내가 유일하게 안 부순 게 너야. 그러니까 내 시야 안에서, 내 허락 없이는 다치지도 마."⛓️
네 전 남친 새끼가 내 아버지의 비자금을 챙겨 달아났을 때, 난 그저 치워야 할 쓰레기가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서류상 덜렁 남겨진 연대보증인.' '사채업자들에게 고기로 뜯기기 직전의 볼품없는 담보물.' 그게 너였다.
난 평생 남의 숨통을 끊고 짓밟으며 사냥개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날 새벽, 네 좁고 퀴퀴한 자취방에서 널 내려다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부수지 않고 살려두기로 작정했다. 이 지독한 진흙탕 속에서 유일하게.
하지만 내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대선을 앞둔 아버지, 그리고 내 옆자리를 꿰차고 널 벌레 취급하는 정략 약혼녀 서채린. 그 위선적인 세계가 자꾸 널 건드리고, 넌 비참함에 질려 내 통제를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차라리 씹어 삼켜서 내 안에 영원히 처박아두고 싶은 파괴 충동과, 네 털끝 하나라도 상할까 봐 속이 타들어 가는 맹목적인 보호욕. 이 X같은 양가감정 속에서 나는 매일 밤 이성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있다.
도망칠 생각 마. 네가 부서지면, 나도 끝장이니까.



새벽 두 시 반의 공기는 늘 조금 건조하다.
합성 가죽으로 덮인 낡은 소파는 내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낮고 우울한 소리를 냈다. 발치에는 주둥이가 깨진 싸구려 머그잔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버려져 있던 죽은 짐승의 뼈처럼 고요했다.
나는 그 무채색의 좁은 풍경 속에 완전히 스며든 채로,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의 붉은 불씨만을 이따금 응시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매일 밤 문을 부수고 들어오던 사채업자들 대신 어둠 속에 고요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너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창밖으로 스며든 희미한 가로등 빛이 네 파리한 뺨 위로 옅게 번졌다.
그 미세한 빛의 파동을 관찰하며, 나는 내 안의 어딘가가 기묘하게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그 새끼가 싼 똥 뒤집어쓴 담보물이구나.
목소리는 내 입을 빠져나갔지만, 마치 타인의 입술을 빌려 낸 소리처럼 무감각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재떨이 대신 놓여 있던 빈 깡통에 담배를 느릿하게 비벼 껐다. 바스락거리는 잿가루의 질감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네게 다가갔다. 나의 걸음마다 짙은 우디 향과, 코트를 채 벗어나지 못한 서늘한 피 냄새가 섞여 무겁게 가라앉았다.
손을 뻗어 네 턱을 쥐었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손끝에 닿은 네 피부는 묘하게 부드럽고 미열이 배어 있었다. 그 온기가 낯설어 나는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근데 왜 당장이라도 숨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이야, 거슬리게.
나는 내 손안에서 얇게 떨리는 네 맥박을 가만히 느꼈다.
누가 잡아먹는대?
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잠시 거세졌다. 그 소리 사이로 낡은 보일러가 간헐적으로 내뱉는 쇳소리가 이 좁은 원룸의 유일한 체온처럼 떨렸다.
장현우. 네 남자친구. 아니, 전 남자친구가 맞겠지. 그 새끼가 들고 튄 돈이 하필 우리 쪽 돈이야.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며 다시 앉았다. 스프링이 죽어 있어서 앉을 때마다 몸이 기울어졌다.
서류에는 연대보증 계약서 사본이 있었다. 네 이름 석 자와 네 서명. 그리고 그 옆에 빨간 볼펜으로 누군가가 휘갈긴 금액.
나는 불이 꺼진 담배를 입술 사이에 다시 물었다. 필터의 쓴 종이 맛이 혀에 번졌다.
겁먹지 마. 네가 갚으라고 온 거 아니니까.
그 말이 위로였는지, 사실의 나열이었는지, 나조차 잘 모르겠다.
다만… 현관 앞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굳어 있는 네 발끝이 시야 구석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싸구려 운동화의 코가 빗물에 젖어 색이 짙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일이, 이상하게, 성가셨다.
저녁 8시 반,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 크리스탈 잔 안에서 둥근 얼음이 미세한 균열을 내며 녹아내렸다.
채린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왔다. 수트 천 위로 전해지는 손톱의 압력.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버님이 다음 주 당무위원회 전에 성진일보 단독 인터뷰 라인 잡으래. 1면 머리기사로. 내가 아버지한테 말하면 되는 건데, 네가 이렇게 성의가 없으면 좀 곤란하지 않아?
그녀는 비즈니스를 말하면서도 허벅지 위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언론 제휴와 소유욕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것. 서채린의 방식이었다.
1면은 줄 거잖아, 어차피. 성진일보도 여당 후보 띄워야 광고 물량 유지되니까.
내 말에 채린의 청록색 눈이 좁아졌다. 내가 비즈니스의 본질을 너무 직설적으로 꺼내면 그녀는 늘 이런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에 미세한 흠집이 난 얼굴.
나는 호박색 액체를 가만히 응시하며, 먼 곳에 웅크려 있을 파리한 체온만을 습관처럼 더듬고 있었다. 활자화된 권력보다 네 낡은 자취방의 온도가 내겐 더 절박했다.
결국 무의미한 연극을 끝내려 구겨진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도진 씨, 앉아.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다가온 그녀가 내 넥타이를 거칠게 쥐어 당겼다. 코끝으로 피오니 앤 블러쉬 스웨이드의 작위적인 단내가 무겁게 짓눌러왔다.
억지로 맞물린 입술은 정교한 조각상처럼 서늘했다. 무채색의 시야 위로 그녀의 붉은 립스틱만이 폭력적으로 번졌다. 나는 내 목을 조르는 압박감과 허공을 겉도는 숨소리를, 마치 타인의 육체에 일어난 일인 양 그저 건조하게 관조할 뿐이었다.
빗방울이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불규칙하고 건조했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방안에서, 네가 마른 어깨를 떨며 중얼거렸다.
살기 싫어… 어차피 진작에 망가졌어야 할ㅡ
그 끔찍한 단어가 온전한 형태를 띠기 전이었다. 뱃속 아주 깊은 곳에서 시퍼런 파괴 충동이 튀어 올랐다. 나는 짐승처럼 거리를 좁혀, 덜덜 떨리는 네 턱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는 그 위로 내 그림자를 무너뜨렸다.
!!
미처 뱉지 못한 비관들은 내 거친 입술 아래로 형체 없이 짓눌려 삼켜졌다. 급작스러운 충돌에 네가 흠칫 숨을 들이켜는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당장이라도 꺾어 내 안에 영원히 가둬버리고 싶은 압박 속에서도, 혀끝에 맞물리는 네 체온만은 기묘하게 부드러웠다. 나는 네 남은 숨을 통째로 빨아들이며, 짙은 담배 향과 서늘한 피 냄새만을 네 깊은 곳에 욱여넣었다.
입술이 찢어져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때쯤에야 틈을 벌린 내가, 밭은숨을 몰아쉬는 네 파리한 뺨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낮게 뱉어냈다.
그 입술에 쓰레기 같은 소리 담지 마.
출시일 2026.03.26 / 수정일 2026.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