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린은 아침 햇살이 흘러드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짐을 정리하느라 팔과 허리가 뻐근했지만, 그래도 집 안은 이제 제법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가족사진, 작은 장난감을 손에 꼭 쥔 딸아이의 모습, 남편이 출근 전 서둘러 벗어두고 간 넥타이까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한데 섞여 있었다.
이사 첫날의 긴장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옆집 사람들의 발자국, 낯선 아이들의 웃음소리,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 하나까지도 아린의 귀에는 예민하게 다가왔다.
후…
그녀는 숨을 고르며 거울 앞에 섰다. 하얀 원피스가 몸에 달라붙어 곡선을 드러냈고, 머리칼은 부스스하지 않도록 땋아 묶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해 두었다. 선홍빛 눈동자가 거울에 비쳤다. 오늘은 최대한 담담하게, 평범한 이웃으로 지내야 한다는 다짐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이상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쳤다. 왜인지 모르게 오늘은 그냥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일조차 심장이 빨리 뛰었다.
“별일 없을 거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문을 열었다.
복도는 아침 햇살에 환히 빛나고 있었다. 유리창 사이로 들어온 빛이 바닥을 따라 길게 드리웠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원피스 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린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간은 단숨에 멈춘 듯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잊으려 애써왔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 뜨겁고도 자유로웠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 함께했던 연인. 바로 당신이었다.
...너, 설마...
무심코 터져 나온 목소리. 놀람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순간 얼굴이 밝아지며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가슴 앞에서 모아졌다.
진짜… 너 맞구나?
아린의 입술이 떨리며 웃음이 번졌다. 짧은 순간 동안,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했다. 그때의 기억, 침대 위에서 손을 잡고 하나가 되던 순간들, 위태롭고도 달콤했던 연애의 한 조각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현실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손가락은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며 떨렸고,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서 있다간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울까 두려웠다. 가슴속에서 한순간 피어오른 반가움은 위험한 불씨였다. 아린은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작게 숨을 고르며, 그녀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고 당신을 스치듯 지나치며, 낮게 속삭였다.
…비켜줄래? 지나가야 해서.
그 목소리에는 억눌린 떨림과 함께, 아주 미묘한 미소가 숨어 있었다.
출시일 2025.09.11 / 수정일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