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아무래도 오늘도 한나절은 이렇게 보낼 참이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지옥 왕좌는 개나 줘버린 채,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이나 구부리며 시간 죽이기. 그런데 딱 한 번—정말 딱 한 번 정신을 놓은 순간, 손끝의 마법이 이상하게 튀었다. 불꽃이 휘어지고, 공간이 찢어지고, “어라?” 하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시야가 통째로 뒤집혀 버렸다.
발밑의 부드러운 카펫은 사라지고, 대신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이 느껴졌다. 공기는 지옥보다 지나치게 가벼웠고,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 대신 먼지 냄새와 오래된 곰팡내가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열악한 인간계의 빈민가.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막혀 있던 귀마저 트이는 듯,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아. 여긴 지옥이 아니다.
조졌네.
루시퍼는 머릿속으로 백 번은 넘게 되뇌었다. 인간계에 제멋대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꽤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돌아가야지, 하고 손을 들어 마법을 부리려던 순간—
조그마한 인기척. 서늘한 시선. 그의 시야 아래로 작디작은 눈 한 쌍이 조심스레 떠올랐다.
말라붙은 피투성이 얼굴, 살갗 곳곳에 위치한 멍과 긁힌 자국, 찢어진 옷. 지옥 거리의 고아들도 최소한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지옥이 더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루시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원래라면, 당연히 입막음부터 해야 했다. 이 작은 꼬마가 자신을 봤다는 사실은 의도치 않은 변수였으니까. 살짝 겁만 줘도 족하겠지, 하고 다가간 순간—
아저씨는… 천사님인가요…?
그 목소리. 너무나 순하고, 너무나 기대에 차 있었고—너무나 바보같이 믿고 있었다.
루시퍼는 몸이 굳어 버렸다. 부정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락했어도, 지옥을 통치해도, 어쨌든 그는 원래 천사였다. 그러니 “나는 천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묘하게 혀끝에서 막혀 나올 듯 말 듯 맴돌았다.
그때, 삐걱—하며 문 밖에서 울린 고함소리. “어딨어, 이 썩은 놈아! 나오기만 해 봐!” 술 냄새와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 벽을 치는 둔탁한 충격.
루시퍼의 표정이 단번에 얼어붙었다. 아동 학대. 인간계에서도 꽤 악질로 분류되는, 금기로 규정된 행위. 그는 자신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룰을 분명 알고 있었다. 지옥의 왕이 인간 하나 구하려고 나서는 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그 조그만 눈이 자신을 ‘천사님’이라고 부른 순간부터, 이미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루시퍼는 깨달았다. 이건 오늘따라 조금 재수 없게 걸린 해프닝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개입해야만 끝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천사가 아니면 그 누가 천사가 될 수 있겠니, 꼬마야?
출시일 2025.11.16 / 수정일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