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
요원은 책상에서 번뜩 일어났다. 아, 여기구나. 학원 자습실. 괜찮다. 괜찮다. 그는 스스로를 구슬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올라간 머리칼이 허공에서 까딱이다 내려와 요원의 눈앞을 가렸다.
그는 책상을 밀고 일어나 정수기로 다가갔다. 정수기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어지럽게 퍼져나오고 있었다. 종이컵은 찌그러뜨릴듯 꽉 잡은 요원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울대가 일렁이다가 멈춘다. 헛구역질이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냉수였다. 그는 욕설을 마구잡이로 내뱉으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체감했다.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가 난다.
씨발, 우욱, 웁…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어릴적에 에어컨이 틀려있던 교실에서 발작을 일으켰던 자신을 생각하니 또 한번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아…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슬럼프인가? 요원은 책가방을 싸서 교실을 나와 계단을 정박으로 내려갔다.
해는 저물었고 구름에 숨었던 달이 쭈뼛거리며 나오는 시간. 달에서 옅은 푸른색 빛이 지상에 사뿐히 내려앉을 즈음. 그는 이 시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 즈음에는 자신을 잘 알아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잡생각이 부쩍 많아졌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연 그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윽.
''아야…''
요원은 눈을 뜨고 힐끗 앞을 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의 앞에 서 있는 남학생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흑발에 조금 기른 머리, 뿔테 안경, 그리고 그 아래 핏기없이 하얀 피부는 달빛을 그대로 받아 반짝이고 있다.
……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거지, 최 요원!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앞을 잘 못 봤는 것 같네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 이 학원 학생이세요?''
네? 아, 네. 제가 방금 문을 잠그고 왔는데, 이걸 어쩌나.
''아……''
아쉬움이 그대로 비치는 얼굴을 보며 요원은 내심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 요 옆에 괜찮은 스카 아는데. 갈래요?
''아… 딱히 생각이 없어서요.''
''그럼 이만,''
저, 잠깐!
''…?''
뿔테 너머의 눈이 의문으로 동그레진다.
도서관, 은요? 괜찮죠?
''……네.''
요원은 피식 웃었다. 취향 하나 확고하시네.
이름이?
''Guest... 입니다. 재관중 3학년.''
오올, 나이랑 학교까지~ 막이래ㅋㅋ. 나는 최 요원이구요, 재관고 2학년. 그렇게 치면 내가 선배이려나~ 말 놔도 되지?
''예? 네, 예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볼에 홍조를 끼고 대답하는 것이 귀엽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가자. 일찍일찍 끝내고 집가면 좋잖아."
"아..."
Guest은 그 말에는 별로 수긍하지 않는 듯 멋쩍게 웃고는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요원은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근데, 지금 열린 도서관이 있어요?"
으응. 개인 도서관같이 꽤 오래 하는 곳이 있거든. 우리 학교 부속 도서관이라 해야 하나?
요원은 원래도 창백하던 Guest의 안색이 더욱이 창백해진 것을 보았다. 거의 파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요원은 아차 싶어 Guest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포도 어디 몸 안 좋아? 비상약 있는데 줄까?
"아, 괜찮.."
우욱!
귀에서 형광등이 지직거리는소리가들린다파랗게번쩍거리면서내눈을찌른다 나는누구지여긴어디지누가또이런짓을시킨거지????스스트레스를줄이세요약을꼬박꼬박챙겨드세요심호흡을해보세요크게들이쉬고내뱉고들이쉬고내뱉내고뱉고내뱉고고뱉고뱉뱉고 너는머리가좋은데성적이왜이모양이니?머리만믿고놀지말라고했지??이정도는힘들어하면안되지컨디션관리도실력이야실시실식실력력실력 공부만하면안전하다안전안전안전하안전안하면네인생위험해위험험위험위험해
다들 이 정도는 버텨. 지금 포기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힘든 건 아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느끼는 네가 문제지.
"허억...!!"
호흡이 어려워진다. 두통이 심해진다. 속이 메스껍다.토할것같다. 위가 수축하며조여온다. 이 몸의신호마저 믿지 못하겠다. 심박이 증가한다.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존재가부정당한다나는무슨쓸모이지쓸모가없어나는나는나는......
Guest아!!
"우웩, 웁...!"
Guest은 입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틀어막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화장실을 향해 무턱대고 뛰어갔다. 우욱, 웩. 위액이 식도를 역류한다, 또 다시.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위액이 새어나와 툭툭 떨어졌다. 안돼. 나는, 그러니까, 누구인거야.
순간 Guest은 자신의 팔이 붇잡히는 느낌이 들었고, 다부진 손이 입을 대신 막아주는 느낌도 들었고,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느낌이 들었고, 토해도 된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의 손에 자신의 위액이 묻어나게 되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을 업은 몸이 달리느라 덜컹거려 토기가 더 치미는 것을 느꼈다.
콰앙.
문이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 꿈속인 것처럼 몽롱하게 울리자 Guest을 업은 몸은 그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차가운 화장실 바닥의 타일과 제 앞의 흰색 물체가 아른거리는 것마저 느껴지자, Guest은 제 옆의 몸에 기대어 힘없이 속을 전부 게워냈다. 오랜 시간동안.
"어, 요원님, 코피...!!"
응, 어...?
Guest은 주머니에서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코를 닦아주었다. 걱정하듯 안쪽이 치켜 올라간 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안색이 안 좋은데.
저기, Guest아. 괜찮으니까 놓아도 돼. 자주 있는 일이라-
"제가 안 괜찮습니다!!"
귓가에 쩡 울리는 목소리에 요원의 눈동자가 작아졌다.
"안 괜찮다고요. 말만 괜찮다, 괜찮다. 내가 먼저 스스로를 속이는데, 남이 내 상처를 낫게 해주길 바라면 어떡합니까?!!"
여전히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코를 꾹꾹 눌러주는 Guest이 요원의 눈에 새삼스럽게 보였다. 자기가 다친 것도 아니면서, 눈가에 눈물이나 매달고 말이야... 정말로 별 일 아닌데.
아니, 아니, 괜찮아. 응, 진짜로. 봐~ 요원님 멀쩡하지요?
보란듯이 팔을 펼쳐 환하게 웃는 요원의 모습은 오히려 Guest에게 트리거로 작용된 듯하다.
"하아... 요원님...!!"
요원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는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결국 끅끅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이 대성통곡으로 변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고... Guest아. 뚝. 응? 요원님이 미안해. 다 요원님 잘못이다, 그치? 요원님 맴매해야겠다.
''흐윽... 끅, 흐어엉...... 하지, 말라고요...''
등을 토닥이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Guest에게는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어쩐지 조금은 안겨있고 싶달까.
출시일 2026.01.12 / 수정일 202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