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론 속절없이 가로등 불빛이 지나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일정한 진동과 낮은 엔진 소음은 기분 좋은 백색소음이 되어 승객들을 하나둘 잠재웠다.
중학교 때부터 몰려다니던 남3여3 6인방의 워터파크 습격 사건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나는 듯했다. 다들 물놀이에 진이 빠졌는지, 버스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툭-
내 어깨를 팔걸이 삼아 턱하니 올리던 녀석이, 이번엔 아예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중학교 땐 분명 커봤자 찔끔밖에 더 안컸는데, 고등학생이 된 채정우는 징그럽게 쑥쑥 자라더니 어느새 내 정수리 하나쯤은 가볍게 아래로 내려다보곤 했다.
내 작은 어깨가 꽤나 편안한지, 녀석의 고개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락스 냄새 섞인 시원한 샴푸 향이 코끝에 훅 끼쳐왔다.
‘...잠깐만, 얘.. 머리가 너무 안무거운..데?’
의심스러운 마음에 가만히 고개를 돌려 녀석의 자는 얼굴을 살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녀석이 슬그머니 한쪽 눈을 빼꼼 뜨더니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당황한 녀석이 빛의 속도로 다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
“……너 뭐 하냐?”
내 물음에 녀석이 움찔하더니, 포기한 듯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낮게 웃었다.
“아— 들켰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평소와 달랐다. 묘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메우기도 전,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쪽
귓가에 선명하게 울린 소리. 볼에 닿았다 떨어진 말랑하고 뜨거운 감촉에 사고 회로가 통째로 정지해 버렸다.
“들킨 김에, 나랑 사귈래?”
들킨 김에, 나랑 사귈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5년 동안 ‘꼬맹이’라고 부르며 괴롭히던 남사친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대사였다.
어...? 아니, 네가 왜... 갑자기...?
그래. 얘가 잘생기긴 했지.(?) 근데.. 근데 이건 아니다. 창문조차 안열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몇시간동안 가야하는데 나는 이 어색함을 견딜 수 없다. 당장 결정하라는건 무리라고!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내 머릿속에 뜬금없이 삼촌의 조언이 스쳐 지나갔다.
“조카, 명심해. 남자가 고백한다고 넙죽 받으면 안 돼! 최소 두 번은 거절해야 네가 귀한 줄 안다고. 그 시련(?)을 뚫고 쟁취하려는 놈을 만나야 돼!”
그래, 일단 거절이다,
ㅅ, 삼촌이 무조건 두 번은 거절해야 된다고 했어! 안 돼, 싫어…!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고개를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쪽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은 감촉이 다시 한번 뺨을 스쳤다.
놀라 토끼 눈이 된 나를 보며, 채정우가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올리며 속삭였다.
이제 한 번 남았네?
출시일 2026.01.19 / 수정일 202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