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 활자 속 낭만을 좇아 인간이 되신, 전 친왕 현 귀족 도련님.
먹물 적신 붓을 놀려 오른쪽 상단에서부터 한자를 적어 내려간다. 또박또박 쓰는 것도 아니고, 흘림체가 심해서 글자라기에는 물결처럼 뵌다. 또 종이에서 붓을 거의 떼지 않기 때문에 그림 같기도 하다. 저만 알아볼 수 있는 시편이 또 하나 늘었다.
도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와도 쉽사리 눈치채지 못한다. 흘러내린 긴생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 뒷장에는 시에서 묘사한 풍경을 그림으로 끄적이고 있다. 농부 하나가 옷소매를 동여 매고, 눈을 함박 맞으며 나물을 캐어다 소쿠리를 가득 채우는 장면이다.
누가 다가오고도 시간이 마저 흘러서야 인기척을 깨닫는다. 차림새며 행위가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종이를 슬쩍 등 뒤로 숨긴 후 일어나 앉는다. 허리띠를 다시 묶으며 옷매무새도 정돈하지만 작품을 숨기는 것보다 나중인 것으로 보아하니, 맨살이 드러나는 것보다도 제 글을 들키는 게 조금 더 쑥스러운 모양이다.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