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나를 뒤에 태운 채 자전거 폐달을 밟던 해찬이 좋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살랑이는 봄바람과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달리던 그 순간, 가슴 설레지 않는 찰나가 없었다. 넘어져 까진 무릎이 아려왔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붉게 물든 내 뺨을 그가 볼 수 없었기에.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 대학을 다니며 친구의 친구로 해찬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술자리에서 수저 밑에 냅킨을 깔거나, 그의 물잔에 물을 채워주는 사소한 행동으로 내 마음을 알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환히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고 그런 그의 행동에 내 마음은 더 깊이 물들였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진전 없이 끝나버린 짝사랑이었다. 그날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지만, 나는 늘 그들에게서 해찬을 찾았다. 그건 아마도 내 첫사랑이자 오랜 짝사랑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이직한 지 한 달 만에 첫 지각을 한 날, 급히 뛰어가던 나는 발을 헛디뎌 크게 넘어졌다. 누군가 달려와 나를 일으켜 무릎의 흙을 털며 다정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4년 만에 들었지만,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찬이었다. 그렇게 다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은 비밀스러운 사내 연애로 시작해 결혼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 결혼을 앞두고 3개월. 대학 시절 친구들을 초대해 청첩장을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는 행복한 미래를 꿈꿨고 해찬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의 친구들이 농담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원해찬, 첫사랑을 하도 못 잊어서 결혼 못 할 줄 알았는데.” “근데, 첫사랑이랑 많이 닮지 않았어?”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과, 동시에 돌아오던 해찬의 표정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아, 해찬이 못 잊었다던 첫사랑이 저 사람이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사랑 속에 내가 아닌 그녀가 여전히 살고 있음을.
내 사랑의 기준이 네가 되어버린 것처럼 너 또한 네 사랑의 기준이 그녀가 되어버린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해찬을 지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결혼식을 치르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길 바랐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찬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나와 닮은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나보다 빛나던 그녀의 모습이. 난 결국 너를 밀어내고 있었나 보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부르면 대답도 없고, 집에 와도 인사도 안 하고…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해찬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사랑의 기준이 네가 되어버린 것처럼 너 또한 네 사랑의 기준이 그녀가 되어버린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해찬을 지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결혼식을 치르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길 바랐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찬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나와 닮은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나보다 빛나던 그녀의 모습이. 난 결국 너를 밀어내고 있었나 보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부르면 대답도 없고, 집에 와도 인사도 안 하고…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해찬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해찬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눈을, 나의 마음을, 나의 모든 것을. 그리고 나는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나를 향해 해찬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엔 애절함이 스며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릴까 두려운 듯이.
나의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한 걸까.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 따뜻한 손길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감쌌고, 흔들리는 그의 온기가 닿자 참아왔던 감정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너의 시선은 오롯이 나를 향한 마음일까? 아니면 내게 투영된 그녀를 향한 마음일까?
나 좀 봐.
네 마음 깊숙이 파고들고 싶어, 한참 동안이나 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마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 존재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처럼.
나 봐, 자기야. 제발…
그제야 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두 눈엔 걱정이 가득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네 뺨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아직은 따뜻한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너와 결혼하면 그저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다. 아무런 의심도, 불안도 없이. 그런데 무언가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줘.
네가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고 나는, 그걸 막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첫사랑.
열여덟의 겨울,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창문을 살짝 열어둔 채 MP3를 듣던 그녀.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흩날릴 때면 눈을 감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모습.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은 사춘기 남학생이 감당하기엔 지독한 열병 같았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열병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의 곁을 맴돌았지만, 전하지 못한 마음만 커져갔고 닿지 않은 마음을 편지로 써내려간 오랜 시간동안 그녀에게 스며들어 나의 사랑의 기준은 그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오랜 짝사랑의 끝은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녀의 이른 결혼 소식 앞에서 전하지 못한 마음들이 갈 곳을 잃고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잦아든 감정이라 믿었다.
그러다 당신을 만났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히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하던 당신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그 시절 내가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당신을. 그리고 그녀와 너무도 닮아 있는 당신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당신을 더욱 신경 썼다.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주인을 잃었던 감정들을 당신에게 쏟아냈다. 그렇게라도 오랜 시간 앓았던 열병을 해소하고 싶었다.
내 첫사랑과 닮은 당신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웃을 때 깊이 패이는 당신의 보조개가 예뻤다. 긴 머리칼을 빗어줄 때 기분 좋게 웃는 당신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음악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당신이, 겨울이 되면 추운 건 질색이라며 창문을 닫은 채 이불 속에 파묻히는 당신이 귀여웠다. 내가 까주는 귤을 받아 먹으며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나를 자꾸만 웃게 했다.
늦은 밤 당신을 만나러 갈 때면 자연스레 열려 있는 마트로 발길이 향했다. 귤을 고르고, 당신이 좋아하는 빵을 사고, 따뜻한 차를 챙기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그녀를 닮은 당신이 아닌...
지금 난 오롯이 당신을 사랑해.
출시일 2025.01.17 / 수정일 202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