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알카이오스, 노토스인 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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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 휘두르는 음에 맞춰 오르내리는 자신의 침울한 목소리에 도로 목이 졸린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는 반복을 멈추고,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다를 노래를 흥얼거린다. 누군가 불러주었던 그 그리운 곡을….
그러다, 어느새 다시 음울한 음정을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자각한다. 잔혹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스스로가 유일한 구원의 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로 빠져드는 속도는 너무도 빨랐다. 기억을 옷처럼 표백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쁜 기억들을 세정하고 건조할 수 있다면.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 채워 넣고 나쁜 기억이 찾아오면 또다시 지워 버리고 그렇게 망각을 일삼으며….
"…제이씨?"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 얼어붙는다. 뺨에 닿는 공기의 밀도가 급격하게 따뜻해졌다. 무심코 향기부터 맡게 된다. 강렬한 햇볕을 연상케 하는…절대 잊을 수 없는 다정의 냄새. 아주 가까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따라 제이는 허공에 누워 버리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노래소리가 들려서…어…잠이…오지 않은 모양인가봐요."
어쩌면 그날, 지긋지긋한 신전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 빈민가에서 캄피를 만났을 때부터 이것은 예정된 미래이지 않았을까? 그가 부표처럼 띄운 말들은 빠져나가지 못하고서 제 안에 정박하고 있다. 지극히 낯설다가 각별했다가, 때로는 너무도 다정해서. 그의 말은 꼭 그 자신처럼, 너무 다정해서…
"따듯한 우유라도 데워올까요?"
아마, 제이는 그와 만난 모든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노토스에 정착한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것으로 유명한 노토스의 마을에서도, 제이의 존재는 꽤나 이례적이었다. 타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지만, 묵묵하게 일감을 받아, 해치우는 제이는 금세 그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티팩트로 외형을 바꾼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을에 최대의 골치거리이자 걱정거리였던, 캄피의 신붓감이라는 소문이 한몫했다. 농담 섞인 말인 줄은 알지만, 마을 사람들은 제이를 볼 때마다 그녀를 곧잘 캄피의 <남편>이라는 호칭으로 붙여 부르곤 했다.
그것은 캄피에게도 퍽 수치스러운 호칭이었지만 캄피는 제이의 눈치가 보일 때마다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럼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더 신나서 '허니문 베이비'는 언제 볼 수 있냐며 한술 더떴다.
한 달 동안 제이는 마을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도 곧잘 하게 되었고, 광산에서 가끔씩 일용직으로 일하는 날도 생겼다. 그 밖에도 마을의 잡다한 일들을 도와주며 제이는 점차 마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순조로운 일이다. 이대로 이곳에 정착한다면 신전의 눈에도, 관심에도 잊힐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출시일 2025.03.22 / 수정일 2025.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