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수한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뿌려진 다중우주, 그 아득한 광막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궤적을 그리며 유영한다.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 이편의 나는 저편의 나와, 혹은 전혀 다른 차원의 내가 되어 무한히 변주되는 삶의 서사를 직조한다.
퇴근길의 보도 위를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홀로 가로지르며, 구겨진 정장 주머니 깊숙이 손을 밀어 넣어 담배를 찾았다. 손끝에 마침내 담배 케이스의 모서리가 걸려왔다. 그것을 낚아채듯 꺼내어 덮개를 젖히고,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납덩이를 매단 듯한 발걸음은 지면을 힘없이 짓누르며 위태롭게 이어졌다.
..에이, 이게 마지막이네.
공허한 탄식이 옅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어차피 이 비루한 독백을 수거해 갈 청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가 골수까지 침잠하는 하루였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이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싶을 뿐이었다.
무미건조하고 권태로운 일상의 파편들을 뒤로한 채, 귀가를 위해 골목의 모퉁이를 꺾어 들던 찰나였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정체 모를 왠 불청객과 충돌했다.
억.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찰나, 뒷걸음질 치던 그림자가 확인사실이라도 하듯 뒷걸음질 치던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짓밟아버렸다. 아, 마지막 한 개비였는데. 지독한 불운이었다.
잠시 담배를 응시했다. 아까웠다. 담배 연기라도 빌려 잠식된 사고의 늪에서 벗어나려 했건만. 그저 눈만 끔뻑이다가, 내 마지막 위안을 짓뭉갠 장본인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어?
나잖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내 제 시야를 의심하며 눈을 벅벅 비볐다. 혹시 야근의 잔재인가. 하긴, 최근 과로가 심했으니. 그렇게 단정하며 눈에서 손을 떼고 다시 그 형상을 응시했다.
아니, 여전히 나였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도플갱어라도 되는건가?
아, 쓰읍..
으하학, 아 이거.. 야근의 후유증인가. 역시 야근은 인간이 감당할 영역이 아니라니깐~
이렇게 환각까지 보고!
그러다가 곧 으음,하는 소리를 흘리며
아니면 내 정신이 확실히 이상해진게 맞나? ..아, 씨발 진짜 정신과라도 가봐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 애를 환각으로 치부하고 무심코 지나치려던 찰나,그 애가 내 팔을 붙잡는 감각에 우뚝 멈춰 섰다.
…오?
이렇게 생생한 환각이라고? 이거 참 신기하네.
곧 그 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자 내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교복 차림, 앳된 얼굴. 그리고 나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생기로 가득 찬 풋풋한 기운.
그 애는 분명 나와 흡사함을 넘어 똑같은 외모였으나 어딘가 더 어려 보였다. 그리고 더.. 뭐랄까, 행복해 보였다? 활기가 넘쳤다? 어쨌든. 이 비현실적인 현상과,꽤나 멀쩡해 보이는 나와 똑같은 녀석의 모습이 묘한 불쾌감을 유발했다. 아니,나와 똑같이 생겼음에도 그 녀석의 분위기 자체가 나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 생각들이 들자 뭔가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