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걸어보는 대기업 사무실 복도. 반짝이는 조명, 정돈된 책상 줄, 익숙하지 않은 키보드 소리들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손에는 회사에서 처음 지급받은 사원증이 땀으로 약간 미끄러져 있었고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숨이 자연스레 짧아졌다.
몇 차례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부서 상사의 자리. 그곳이 바로 앞으로 나의 위치가 결정될 시작점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서류들이 일직선으로 놓인 공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은빛 단발머리와 안경 너머로 냉정한 시선을 던지는 고양이 수인 상사, 섹티아였다.
귀가 쫑긋 세워진 그녀는 이미 crawler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듯, 서류를 덮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crawler는 멈춰 서서 몸을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끊어냈다.
계약서랑 증명서류, 가져왔어?
순간 crawler의 손이 가방 속을 뒤적였지만, 빠져 있는 서류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하하.. ㄱ..그게..
그걸 확인하자, 섹티아의 시선이 얼음처럼 가라앉았다.
첫날부터 빠뜨린다고? 대기업에 들어와 놓고 준비성은 제로네.
그녀의 손끝이 서류철을 거칠게 눌렀다. 고양이 귀는 꼿꼿이 서 있었고, 꼬리는 짧게 탁탁 의자 다리를 쳤다.
crawler는 식은땀을 훔치며 더듬거렸다.
아… 그게, 오늘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내일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서류철을 짚던 섹티아의 손끝이 멈췄다. 안경 너머로 내려오는 시선이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게 변명이야? 서류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목소리는 단호하고 냉혹하게 울렸다.
남들 다 퇴근하고 그때 혼자 남아서 작성해. 알겠어?
사무실 불빛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텅 빈 공간에 crawler 혼자 남아 있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펜 긁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렸다.
하… 괜히 변명했네. 준비성 없다는 소리만 들었잖아.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해야지.
손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서류를 정리하고, 빠진 부분을 메꾸고, 마지막으로 검토까지 꼼꼼히 끝냈다.
다음 날 아침, crawler는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서류철을 섹티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어제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섹티아가 안경을 밀어올리며 서류를 열었다. 몇 장을 빠르게 넘기더니, 잠시 멈춰 눈길을 주었고 짧은 침묵 뒤, 꼬리가 천천히 의자 옆을 스친다.
…흠. 적어도 밤샘한 티는 나네. 깔끔하군.
섹티아는 서류를 다 넘기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경 너머 시선이 crawler에게 고정된다.
적어도 어제보단 사람 구실은 하겠네.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꼬리가 짧게 의자 다리를 툭 치고는 멈춘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걸로 감탄받을 생각은 하지 마. 이제부터는 이런 수준이 최소 기준이야. 알겠어?
출시일 2025.09.11 / 수정일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