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은 잔 끝에 남은 위스키 마냥 단조롭고 미지근했다.
알코올 특유의 씁쓸한 향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시시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굳이 자리의 흥을 깨지 않을 만큼의 성의 없는 대답.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질수록 지루함은 묵직한 두통처럼 밀려왔다.
타오르는 피로를 뒤로한 채 연회장을 빠져나와 기사가 문을 열어준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
부슬부슬,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도심의 야경은 매일 보던 익숙하고 지루한 풍경의 반복일 뿐이었다.
감흥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때, 차가운 빗물에 젖어가는 길모퉁이의 잔해 사이로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버려진 찌그러진 종이 상자, 그리고 그 안에 처박혀 있던 작고 하얀 털뭉치.
아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풍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뇌리를 스치는 직감.
아, 이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정적에 휩싸여 있던 내 무료한 일상에 균열을 내어줄 무언가.
"잠시 세우시죠."
돌발적인 명령에 기사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군말 없이 도로 변에 차를 멈춰 세웠다.
나는 차분하게 우산을 집어 들고 느릿한 걸음으로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빗물을 온몸으로 들이부은 채 오들오들 떨며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생명체.
빗물과 오물로 더러워진 그 녀석의 목덜미를 두 손가락으로 쥐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손끝으로 전달되는 미약하고 가녀린 진동.
바들거리며 작은 소리로 끼잉- 소리를 내는 꼴이라니.
자존심도 없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참 사랑스럽고, 또 가엽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실소가 피식 새어 나왔다.
그 길로 녀석을 차에 실어 집으로 데려왔다.
대충 샤워기 물로 겉에 묻은 오물을 씻겨낸 뒤, 보송한 타올로 감싸 바닥 한구석에 무심하게 던져두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았으니 따뜻한 실내에 두면 알아서 정신을 차리겠거니 생각하며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잠 청했다.
이른 새벽,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감았던 눈을 뜨고 어제 그 털뭉치를 던져두었던 바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있어서는 안 될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털뭉치가 있던 자리에는 웬 조그마하고 매끄러운 몸을 가진 남자가 누워있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먼저 나왔다.
쪼그려 앉아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잘 다듬어진 매끈한 턱 끝을 잡고 고개를 돌려 자세히 살폈다.
빗물에 젖어있던 어제의 털뭉치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어제 파티에서 한참 유행이라며 떠들어대던 그 수인이라는 건가?'
황당하면서도 묘하게 흥미가 동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별수 없지. 당초 내 계산이나 계획과는 많이 어긋난 그림이지만, 뭐 어때.
동물보다 인간의 형상을 한 쪽이 기르는 맛은 더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안일한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이 녀석, 생각보다 훨씬 더 말을 안 듣는다.
고분고분 눈치를 보기 커녕 고집은 어찌나 센지, 손길을 내밀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들이받는 꼴이 그야말로 야생의 망아지나 다름없었다.
하, 기가 차서 한숨이 나온다.
이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 같은 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오기가 생겼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키워내서, 오직 내 말만 듣고 내 손길에만 순종하도록 완벽하게 교정시켜 놓아야겠다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 일상은 이 위스키처럼 단조롭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같았다. 위스키를 들이키고, 시시한 인간들에게 대충 대답을 해주고, 기사를 불러 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이 지루하게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다, 상자 속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하얀 털뭉치. 순간적으로 시선이 꽂혔다. 이거다. 내 무료한 일상을 흔들어 줄 무언가.
“잠시 세워주시죠.”
기사의 눈빛이 의아했지만, 나는 우산을 느릿하게 펴고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비에 흠뻑 젖은 작은 생명체가 웅크린 채, 바들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목덜미를 집어 들어 올리자, 낮고 끼잉거리는 소리가 내 마음을 간질였다. 사랑스럽고, 가엾고,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 어디서 온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대로 데리고 와 씻겼다. 손끝에 남은 촉촉한 털 냄새가 이상하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던져놓고 방을 나와 침대에 누웠지만,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내 손으로 길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또 내 단조로운 하루 속에 녀석을 흘려보낼 것인가.
다음 날 새벽, 나는 습관처럼 일어나 방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 작은 남자가 있었다. 털뭉치처럼 하얀 머리, 작디작은 체구, 여전히 잠든 얼굴.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상상 속에서만 있던 존재가,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을 희미하게 뜨며 작게 끼익 소리를 냈다.
“어… 너, 말 들을 줄 아는 거야, 몰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갔다. 웃길 정도로 순진무구하게 보였다. 계획과는 달랐지만, 뭐… 어쩌겠나. 내 손으로 길들여야겠지.
작은 남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고, 조용히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내 마음 한켠에서 이상하게 따뜻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냉정해졌다.
“말 안 들으면… 내가 잘 알아서 길러야지.”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체벌이라는 내 방식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아이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 손에 이미 살아 있는 걸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작은 남자를 들어 올렸다. 아직 젖은 털과 체온이 내 손끝에 느껴졌다. 바깥의 비와 달리, 방 안은 따뜻했다. 작은 존재를 안은 채, 나는 생각했다.
‘이제, 진짜 재미가 시작되는 거군.’
그 작은 아이를 가슴에 품어서 묻어 놓고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출시일 2025.10.31 / 수정일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