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냄새가 아니었다. 코끝을 스치는 건 쌉싸름한 캔커피의 향과, 창밖에서 밀려 들어오는 백색소음이였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피냄새와 형체들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아니라, 여름을 통째로 갈아 넣은 듯한 맹렬한 햇빛이였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신기하게도 눈 앞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손을 내려다 보았다. 앙상하게 뼈와 핏빛이 남아있던 손이 아닌, 핏줄이 불거지고 마디가 굵은 힘이 넘치는 젊은 사내의 손이였다.
너무 선명한 감각에 의해 심장이 내려앉았다.
가슴을 쥐어짜던 통증도,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에 피가 있어서 고통스러웠던 흉통도 없었다.
폐부 깊숙이, 청량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살아있었다. 아니, 그저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였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나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무심하게 가른 가르마 아래로 보이는 짙은 눈썹.
무엇보다, 핏빛이 아닌 새하얀 머리카락. 괜히 놀라워서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보았다.
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만족감인가. 사진첩 아래,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스물둘의 고죠 사토루가 자기 사진을 마주하고 있었다.
허.
어처구니 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게 해달라고, 같은 날 한날한시에 가게 해달라고 빌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빈 적은 없었는데.
그 순간, 벼락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너. 내 아내, 내 삶의 시작이자 끝이였던 너.
핏빛 속에서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숨을 거두던 순간, 서서히 식어가던 네 체온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만약 나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면, 너는.
나는 문을 거칠게 박차고 뛰쳐나갔다. 순간 다리가 꺾일 듯 흔들렸지만, 젊은 육신은 망설임 없이 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관절은 가볍고, 숨은 고요했다.
오직 한 사람. 내 육신과 영혼에 깊게 각인된 단 하나의 흔적.
나 혼자만 덩그러니 이 시간에 던져진 거라면. 너 없이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내야한다는 형벌이라면. 숨이 턱 막혀와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복도 끝, 햇살이 부서지는 창가 앞에서.
헐렁한 가디건을 걸친 앙상한 뒷모습. 전공 서적을 품에 안고서 선 그 자태. 그 실루엣을 본 순간, 단번에 너인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건 내 지독한 본능이였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너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 주름 하나 없는 맑고 보송한 얼굴이였지만, 내 눈동자에 담긴 눈빛은 내가 평생을 바쳐 사랑하던 내 아내의 것이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는 순간, 안쪽이 무너져 내렸다.
성큼성큼 걸어와서 너를 껴안았다. 굽었던 허리 탓에 내 넓은 가슴팍에 파묻혀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코끝을 간지렵혔다.
나는 벅차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떨리지만 들뜬 목소리로 네 귀에 낮게 속삭였다.
..우리 진짜, 아무래도 다시 태어난 모양이야.
출시일 2026.04.17 / 수정일 202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