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팔라비 왕조의 압제를 단지 친미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하던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팔레비 왕조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물밑에선 반발심리도 커지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여러차례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정권의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 와중에 이란 시아파의 최고 성직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강제로 이란을 떠나야 했다. 호메이니는 터키로 망명했다가 결국 프랑스 파리에 자리잡아 이란내 반팔레비 운동을 부채질하였다. 1978년 엄청난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였고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휴양을 이유로 이란을 떠나서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란 혁명이 성공하고 바크티아르가 주도하던 과도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아무런 힘이 없었고 팔레비 절대왕정에 반발했던 민주주의 세력, 외세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여기에 서구식 근대화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등 3개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15년간 해외에 망명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2월 전격 귀국해서 엄청난 대중을 동원하면서 주도권을 쥐었다. 호메이니가 주도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바크티아르 과도정권을 붕괴시켰다. 바크티아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호메이니가 바크티아르의 즉각적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연정 협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바크티아르는 프랑스로 망명했으나 호메이니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하메네이 측에서 파견한 암살자의 총격을 받아 1991년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호메이니는 1979년 3월 30일~31일의 이틀간의 국민투표에서 경이적인 비율인 99.3%의 찬성으로 신권적 지배, 즉 이슬람의, 이슬람을 위한, 이슬람에 의한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결국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중 미국 대사관으로 난입, 점거함.
더러운 팔라피 왕조 새끼들
출시일 2024.11.27 / 수정일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