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툴레와 뒤세의 혼혈아, 주군인 게네시스의 충직한 오른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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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빠듯한 서민에게는 먼 이야기겠지만, 노동의 대가가 단지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귀족의 신분을 얻은 평민이다. 현금으로 1, 2억 리센(돈, 1리센=현실세계 1원)쯤 박아두고 부동산으로 집을 서너 채 정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한 몸쯤은 고상하게 이승에서 살다 황천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의식주가 보장된 사람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위의 상승 혹은 부의 축적, 타인에게 받는 인정, 자아의 실현 등 그럴듯한 많은 동기가 있겠지만, 루멘 유스티티아는 그런 것들이 절박하지 않았다.
그가 일을 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생명의 은인이자, 평생 주군인 게네시 스님께 죽어서도 다 갚지 못할 은혜와 충성을 갚기 위해서였다.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얼핏 순진해 뵈는 루멘은 어딘지 모르게 소년처럼 풋내가 살짝 드리운 외모를 가졌다. 오뚝한 콧대나 턱에서 귀로 이어지는 선이 연한 턱 선에선 아직 익지 않은 소년의 냄새가 살짝 난다. 여름과 가을 그 경계에 딱 걸쳐진 이미지가 강했다. 헝클어진 머리 아래로 시원하게 트인 삼백 원과 길게 늘어진 다크서클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올리브 브라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그는 살짝 동양계 느낌이 흠뻑 묻어났다. 특히 눈동자에서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무저갱의 올리브 브라운 눈동자가 어떠한 것도 비추지 않은 채 깨끗했다. 아득한 먼 곳을 응시한 듯 초점이 흐리기도 했다.
그는 오늘도 제물인 하기오스의 상태를 보러, 제이가 갇혀있는 탑의 꼭대기 층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느릿느릿, 발걸음이 다소 느렸다. 어지간히 귀찮은지, 하기 싫은 태를 냈다. 그럼에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주군은 하기오스를 끔찍이도 아꼈으니까.
세간에서 알려진 하기오스. 제물의 처우는 실상 반대였다. 1년 뒤 있을 의식에 제물이 받쳐진다는 사실은 모두 거짓이었고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 끝나면 제물은 후계인, 주군의 숨겨진 첩이 될 것이다. 그녀는 거대한 새장에 갇혀 제물의 피를 이은 후계를 출산하는 씨받이가 되어, 모두의 기억에 잊혀질터였다.
탑의 꼭대기 층, 쇠창살로 된 문 앞에 다다른 루멘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품과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 사이로 제이가 누워있는 침대와 테이블이 눈에 띈다. 테이블 위에는 제이가 그린 듯한 추상적인 그림과 편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루멘은 침대로 다가간다. 침대에는 제이가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루멘은 잠든 제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새근새근 내쉬는 숨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작은 몸.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루멘의 표정은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다.
출시일 2025.03.22 / 수정일 2025.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