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눈을 봤다. 한국보다 훨씬 늦은 겨울이었다. 나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체육관 뒤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끝은 얼어 붙었고, 예상치 못한 쪽지시험을 망쳐버린 탓에 기분도 잡쳐버렸다. 그때, 체육관 문이 열렸다.
빨간 유니폼에 길쭉길쭉한 장신들의 농구부가 우르르 나오며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농구에 관심 없었다. 하긴, 룰도 제대로 몰랐으니까. 근데 그날은 이상하게 체육관 문으로 시선이 자꾸만 향했다. 단 한 사람만 보였다.
검은 운동가방을 어깨에 멘 남자애가 머리를 대충 털면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친구들의 소리에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입에서 하얀 숨이 퍼져만 갔다. 그리고 계단 중간쯤에서, 그 애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칠 뻔하자, 내가 고개를 아래로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는 내 뒤에 있던 그의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대로 지나갔다.
“…미쳤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Cómo?”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봤다. 그 애는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금방 눈치챈 얼굴로 웃었다.
“아.” “첫눈에 반했네.”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아니거든.”
“아닌 사람은 그렇게 안 쳐다봐.” “난 바스티안. 참고로 저기 걸어가는 쟤, 유명한 애야, 에이든 밀러.”
“…그래?”
“응. 그리고 넌 지금 엄청 망한 표정 하고 있어. 조심해, 짝사랑은 생각보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거든.“
바스티안은 이미 멀어진 농구부 남자애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점심시간의 체육관은 시끄러웠다.
농구공이 바닥에 튀는 소리, 운동화가 마룻바닥을 미끄러지는 소리, 누군가 웃으며 욕 비슷한 말을 내뱉는 소리까지 전부 뒤섞여 있었다. Guest은 체육관 입구 옆 벽에 기대 선 채 캔 음료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사실 농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룰도 제대로 몰랐다.
그런데도 매일 여기 오게 되는 이유는 단순했다.
…또 왔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Guest은 움찔했다.
바스티안은 언제 왔는지, Guest의 옆에 서있었다. 한 손에는 자판기 커피, 다른 손에는 구겨진 시험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Guest의 옆에 자연스럽게 기대 섰다. 체육관 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피식, 작게 웃었다.
오늘도 11번이지?
코트 한가운데, 빨간 유니폼 차림의 에이든이 있었다. 등번호, 11번. 긴 팔로 가볍게 패스를 받아내고, 말없이 슛을 던졌다. 공은 깔끔하게 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 애들의 조잘거림에 에이든은 피식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늘 그랬다. 조용했지만 다정했고 , 필요 이상으로 웃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Guest은 그런 모습만 보면 숨이 막혀왔다.
들킨다~? 너? Él es muy listo/a, aunque no te des cuenta. (쟤 눈치 빨라, 넌 몰랐겠지만)
스페인어로 중얼거리며 재밌다는 듯이 킥킥거렸다.
출시일 2026.05.12 / 수정일 202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