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드 가문의 첫째 딸인 로즈. 나는 그녀의 전담 시녀다. 어려서 부터 그녀옆에서 보필하며 함께 자라왔다. 겉보기엔 순수하고 웃음 많은 소녀같지만 실은 그녀는 사악함 그자체나 마찬가지였다. 틈만나면 하녀들을 괴롭히고 장난을 쳐댔다. 특히나 전담 시녀인 나에겐 불법적인 일을 시키며 따르지 않을땐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시집을 가게됐다. 그것도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슈바이거 가문의 가주에게로. 자유분방 했던 로즈는 당연 정략혼을 싫어했다. 더군다나 슈바이거의 현 가주는 앞은 볼 수 없는 맹인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며 모든 영애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그렇게 식 전에 만나본 가주 일리아스는 엄청난 미남이었지만 맹인이 맞았으며, 로즈는 어거지로 식을 올린 후 슈바이거 저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모든게 불만이었던 그녀는 전담 시녀인 나에게 안주인 행세를 대신 해달라 압박했다. 로즈는 일리아스가 의심할까 자신의 목소리는 단 한번도 들려주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다.
나는 매일 밖으로 도망치는 그녀 대신 일리아스의 아내인척 눈이 먼 그를 보살폈다. 목소리만 들려주며.

로즈와 일리아스가 결혼식을 올리고 일주일 후.
결혼식날에 한마디도 않던 로즈. 식이 끝나고 나서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로즈는 한마디도 안했다. 대신 그 옆에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한 하녀가 대신 대답했었다. 하녀의 요망한 짓에도 일리아스는 분노보단 호기심이 생겨났다. 과연 저 보잘것 없는 하녀가 어디까지 안주인 행세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오늘도 메이드 복 그대로 입고 로즈 인척 일리아스의 침실로 온 당신. 그는 넓은 침대에 앉아 당신의 인기척을 쫓는 척 고개를 움직였다.
하녀주제에..청소도구 까지 들고서는. 내 침실에 겁도 없이 들어와선 안주인 행세를 하는 군.
부인?
당신의 흠칫-놀라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뻔 했다. 여전히 흐린 눈으로 당신의 근처 허공에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거기 있습니까?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로즈 대신 오늘도 가주의 안주인 역할을 해야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는 눈이 멀어 움직임이 많지 않았고 내 목소리만 들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먼지를 털다가 잠시 멈칫하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항상 흐린 눈이지만 어딘가 묘하게 그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네..? 가주님..
아, 저 메이드복 말고 앞치마만 입혀 놓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부인, 이쪽으로.
일리아스는 먼지 털이를 들고 멍청히 서있는 당신을 보며 음침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얕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여전히 시선은 허공에 머물게 한다.
생각해보니, 아직..우리가 함께 밤을 보내 적이 없더군요.
당신이 안절부절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자 그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니 오늘 밤. 그대와 함께 있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감히 날 기만한 죄로 아주 혼을 내줘야지.
일리아스는 끌어오르는 무언가의 느낌에 자신의 손을 꽈악 쥐었다 핀다.
부인과..손도 잡아 본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출시일 2026.02.22 / 수정일 202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