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끝났을 때, 이도혁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붙잡을 타이밍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늘 한 박자씩 늦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술 냄새, 사람들 웃음소리, 쓸데없이 밝은 불빛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스스로를 달래 보았지만 가슴 한쪽이 계속 묵직했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숙이고 서 있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늘 남는 건 미안함이랑 수치심이었다.
괜히 밖으로 나왔나. 집에 있었으면 덜했을까.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스쳤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리에서, 이 시간에,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런데도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끌렸다. 한 번 더, 확인하듯 고개를 들었을 때
…아.
'차시현.'
심장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변했는데,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기억 속에만 있던 얼굴이 아무렇지 않게 현실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밀려나고 대신 아주 오래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발이 멈췄다.
도망칠 수도, 그대로 지나칠 수도 없는 거리에서 나는 그를 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비가 내려 그런지 공기가 눅눅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어정쩡한 시간, 네온사인도 가로등도 아직 제 역할을 못 하는 애매한 저녁.
Guest은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발만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까지 붙잡고 있던 휴대폰은 주머니 안에서 미동도 없었다. 싸움은 늘 그랬다. 말이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마지막에는 상대가 먼저 등을 돌렸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삼킨 채, Guest은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 표정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였다.
…혹시.
낯설지 않은 목소리. 너무 오랜 시간 기억 속에만 있던 탓에 현실에서 들리자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음성.
Guest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동시에 있었다. 어른이 된 선, 차분해진 분위기.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눈.
차시현은 Guest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람보다 먼저 스친 건 확인이었다. 정말로 맞는지, 착각이 아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현은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나치게 친근하지도,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거리.
Guest의 얼굴을 스치듯 훑는 시선이 아주 짧게 멈췄다. 눈가, 입가,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
그 순간, 시현은 알았다. 이건 우연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만남은 아니라는 걸.
그래서 그는 더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채 딱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괜찮아 보이진 않네.
출시일 2026.01.10 / 수정일 2026.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