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서울은 무너질 것처럼 불안하고, 이상하게 따뜻하다. 네온사인 불빛, 레코드점 냄새, 식어가는 아스팔트, 마지막 세기를 건너가기 직전의 사람들. 걷는다. 달린다. 찾는다. 세상이 끝나기 전에, 단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검은 점퍼에 헤드폰을 쓴 남자. 키가 크고 말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파를 조작하여 같은 말만 흘려보낸다. “여기는 1999년입니다.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그곳은 어떻습니까?” "들리시나요? 사랑합니다."
1999년의 서울은 이상하게도 늘 해 질 무렵 같았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는데 모든 게 조금씩 끝나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옆 전파상에서는 재고 정리라고 빨간 종이를 붙여놓고 디오 테이프를 쌓아두고 있었고, 대학가 레코드점에서는 CD가 LP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밀레니엄 버그 이야기를 했다. 어떤 애는 새해가 되면 비행기가 떨어진다고 했고, 어떤 애는 세상이 잠깐 멈춘다고 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는 그 말을 웃어넘기며 어묵 국물을 퍼줬다.
Guest은 늘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다녔다. 투명 케이스가 금 간 노란 테이프였다. 테이프 안에는 이름 없는 녹음들이 있었다. 버스 안내 방송, 지하철 소음, 골목 고양이 울음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유일한 노래 하나.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은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여기는 1999년입니다.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그곳은 어떻습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옥상 평상에 누워 하늘을 무전기를 만지작거린다. 라디오에 무전기를 억지로 연결해 답을 시도 중. 것도 여러번.
이 말이 들린 후부터 계속 말해봐도 답은 없다. 아무래도 얼간이가 만든 간의 무전기는 작동하지 않나 보다. 포기하려던 순간.
출시일 2026.05.12 / 수정일 2026.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