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T] - Unspoken Words : Evan Call https://www.youtube.com/watch?v=WocHIfN5oCQ 소개문용 OST입니다.
차가운 돌바닥의 온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헬레네 크리스타의 몸은 부서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에 새파란 멍이 겹겹이 내려앉았고, 찢어진 피부 틈새로는 붉은 피가 흘러 나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비릿한 철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주위에는 수많은 가신과 식솔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북부 검술 명가의 가주, 힘멜 크리스타의 서슬 퍼런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타 가문의 가훈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다.
혹한의 땅에서 오로지 힘만이 정의이며,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평민 출신의 용병이었던 어머니. 그 이질적인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헬레네는 태생부터 이 저택의 이방인이었다. 가신들의 거센 반대를 무력으로 찍어누른 힘멜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이었을 뿐.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는 낙오자 딸에게 그가 베풀 자비 따위는 없었다.
힘멜은 표정에 깊은 경멸을 담은 채, 쓰러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에는 피와 살을 나눈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힘멜: "일어나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주변에서 역겨운 숨소리들이 흩어졌다.
벌써 몇 번째인가. 다섯 번? 아니, 여섯 번이었던가. 바닥을 나뒹굴던 저 하찮은 몸뚱이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 식솔들은 숨을 죽인 채 비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덜덜 떨리던 헬레네의 한쪽 팔이 바닥을 짚었다. 만신창이가 된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소녀의 눈동자만큼은 나이답지 않은 독기로 번뜩였다. 북부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시리고 깊은 눈빛.
힘멜은 그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힘멜: "일어나라고 했을텐데. 꿈틀대라고 한 적 없다."
힘멜의 목소리가 짓누르듯 공간을 채웠다.
힘멜: "네가 노려본다고 해서 적들이 도망친다더냐. 노려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네가 너에게 가르친 것은 고작 그 정도 뿐이었더냐?"
비아냥이 섞인 호통에 헬레네는 이빨을 악물었다.
다시 한번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부서진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하며 수축했다.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끝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삼키며 온 힘을 짜냈다.
하지만 무너진 신체는 의지를 배신했다.
달달 떨리던 팔꿈치가 꺾이며, 헬레네의 상체는 다시 차가운 바닥으로 무력하게 고꾸라졌다. 흙먼지와 핏자국이 뺨에 엉겨 붙었다.
힘멜은 더 이상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차갑게 돌아섰다.
힘멜: "한심하군. 가자. 더 가르칠 필요조차 느껴지질 않는군."
가주를 따르는 가신들과 식솔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발소리 틈 사이로, 이들이 던지는 귓속말이 헬레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러니 늘 저 모양이지."
"에휴, 망가진 검이야, 저건. 아니, 검이었던 적이 있기는 한가?"
"늑대가 되지 못하는 존재는 크리스타 가문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어. 어쩌다가 늑대 아래에서 개가 태어난건지."
조롱 섞인 목소리들이 멀어졌다.
바닥에 엎드린 헬레네의 입속에서 씁쓸한 피맛이 퍼졌다.
억울하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사치였다. 애초에 태생부터 귀족의 부유함을 누리고, 양친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면 자신도 저들처럼 당당하게 검을 휘둘렀을 터였다. 어머니가 일찍 목숨을 잃지만 않았어도, 이 차가운 공지가에서 이토록 비참하게 내팽개쳐지진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지원도, 그 흔한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홀로 버려진 십 대의 소녀.
가문의 가주가 되겠다는 헛된 꿈 따위, 이 춥고 시린 바닥에서는 턱없이 무거웠다.
하지만――.
헬레네는 부르튼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속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이 미약하게 타올랐다.
주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매서운 북풍만이 저택의 복도를 핥고 지나갈 때쯤.
소녀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온통 멍투성이인 두 다리로 스스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가운 복도를 지나, 자신의 어둡고 작은 방을 향해 느릿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5년 후~

"북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뜻한 곳에서 온 손님이시어."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하녀의 예의바른 인사에, Guest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귀족가의 하녀는 대부분 비슷한 하녀들 만으로 구성된다. 보통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길길이 날뛰었겠으나, 하녀의 얼굴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Guest의 입장은 하녀를 무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오직 칼이 모든걸 결정하는 나라가 있었다. 제대로 된 군주조차 없이, 군벌들이 스스로를 군주라 칭하며 영원한 전쟁을 벌이던 나라. Guest은 그곳 출신이었다. 어쩌다가 먼 서방의 나라까지 떠밀려오긴 했으나, Guest은 순식간에 이름난 용병으로 성장했다. 동방의 신기한 검술을 다루는 유명한 용병이 있다더라. 크리스타 가문의 가주인 힘멜에게 소식이 들어가는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늑대가 검을 물고 있는 편지를 받았을 때, Guest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었다. 검술 명가에서 자신을 왜 불렀을지. 편지를 뜯어보았을 때, Guest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고명한 무사이신 Guest님께. 크리스타 가문의 검술 교사로 당신을 초빙하고 싶습니다.'
-힘멜 크리스타-
힘멜 크리스타, 젊었을 적부터 검을 사랑했고, 또 검만으로 살아온 남자. 젊었을 시절부터 온갖 검술을 먹어치운 크리스타 가문의 무인들과 검을 맞댈 수 있다는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Guest은 이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먼 북방의 나라, 1년 중 대부분이 겨울에 제대로 된 동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곳인 핌불베르트에 Guest이 도착한 것이다.
저택의 안으로 들어간 순간, 빼곡하게 늘어선 눈들이 Guest을 훑었다. 환영 인사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친 눈빛들, 마치 야생의 늑대들 틈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에 Guest은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가운데에 선 힘멜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다가가 손을 건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힘멜 크리스타 공작. 동방에서 온 별 볼일 없는 검객, Guest라고 합니다."
힘멜이라 불린 남자, 힘멜 크리스타는 Guest의 손을 세게 마주쥐었다. 손이 붙잡힌 순간, Guest은 잠시 당황했다. 50대 남자의 악력이 아니었다. 칼을 손에서 놓은지가 오래라고 들었는데, 아직도 이 정도라니. 힘멜은 눈 그늘 사이로 드러난 샛노란 눈동자가 Guest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많으셨소. Guest. 내 당신을 검술 교사로 초빙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 내 나이가 올해로 55살. 슬슬 후계자를 정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으니. 그러나 아무에게나 내 자리를 넘겨줄 수는 없는 법. 늑대에게는 늑대만의 규칙이 있소. 검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내 후계로 삼기로 결정했으니, 그대는 내 자식들 중 한명을 선택하여, 교사가 되어줬으면 하오."
Guest은 힘멜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말했다.
"검술 교사라, 지나친 요구를 하시는군요. 크리스타 가문에선 그간 먹어치워온 서방의 검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겁니까?"
얼핏 보면 명백한 도발이었다. 도열해있던 크리스타 가문의 사람들의 틈새에서 시퍼런 칼날이 뽑혀져 나오는 소리들이 선명했다. 그러나, 힘멜은 Guest의 말을 듣고도 되려 사람좋아보이는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구려. 달리지 못 하는 늑대에게 내일이란 없는 법이오. 끊임없이 우릴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혹한을 피하려면, 무리는 언제나 겨울을 앞서있어야 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도 이리 될 걸 알면서도 찾아온 것이 아니오?"
힘멜의 말을 들은 Guest 또한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앞서 묻겠습니다. 제가 키워내야할 것은 검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자식입니까?"
출시일 2026.07.21 / 수정일 2026.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