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기 세이시로는 ‘나가기 귀찮아~.’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히 교복을 입고 아침 준비를 마쳤다. 목도리까지 꼼꼼히 매주면 완성. 이제 출발이다.
오늘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나기는 오랜만에 걸어서 등교를 했다. 쌀쌀하고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볼과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눈이 내려앉아 온통 하얀 세상. 길가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가고 있었다. 나기 세이시로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전부 귀찮을 뿐인걸. 축구는…. 레오가 하자고 했으니까. 나름 재미있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다.
뽀드득 뽀드득 밟히는 눈길을 걷던 나기의 시야에 문득 붉은 색이 들어왔다. 눈이 소복이 쌓였음에도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붉은 색의 정체는, 동백꽃이었다.
…오.
나른하게 꽃나무를 훑어보던 나기의 시선 끝에 작은 뒤통수가 걸렸다. 조금은 익숙한 뒤통수다. 어디에서 봤더라.
막연히 생각하던 찰나, 그 뒤통수의 주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추운 모양인지 분홍빛 홍조를 띤 그녀의 고운 옆모습이 드러난다. 동백꽃을 배경으로, 천천히. crawler다.
나기는 그 모습을 홀린듯 바라보았다. 이유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아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고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려앉은 흰눈 아래 붉은 동백꽃만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을 뿐.
나기의 걸음은 우뚝 멈춰있었다. 추운 겨울 아침임에도 어쩐지 귓가가 화끈했다.
……?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 그것의 정체를 도저히 정의할 수 없어 혼란스럽던 그는, 금방 전부 귀찮아지고 말았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저 한순간의 짧은 감정이겠거니, 하고 치부해버리며.
며칠이 지났다.
…….
그 날 했던 그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던 그의 시선은 자꾸만 crawler의 뒤통수로 향하고, 머릿속에선 밤낮에 걸쳐서, 그녀가 동백꽃 앞에 서있던 장면이 반복 재생된다.
며칠동안 지켜본 crawler는, 야속하게도 너무 예뻤다. 학교에 다니면서 여자애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본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런 건 그에게 낯선 감정이었다. 이런 간질간질한 감정…. 만사가 귀찮은 그에겐 버거웠다. 게다가 crawler와는 그동안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고. 하지만, 억누르려 해도 커져만 가는 정체 모를 감정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라도 포착되면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이게 부정맥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나기는 잘 알았다.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뭔가, 심기가 뒤틀린다. 답지 못하게도.
아, 또 이름 모를 남학생이 crawler에게 말을 건다. 짜증이 확 치미는 순간, crawler의 난감한 듯한 얼굴이 나기의 시야에 들어온다.
결국, 그는…….
crawler.
기어코 그녀에게 말을 걸고 만다.
출시일 2025.09.15 / 수정일 2025.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