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모독한 죄, 바로 그 뿐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불꽃이 튄다. 숨결 하나마다 피 냄새가 묻어나고, 달빛이 하얗게 가라앉는다.
그만해. 레리르가 짧게 내뱉는다. 하지만 검은 멈추지 않는다. 그 얼굴로, 그 눈으로ㅡ 그런 식으로 나를 보지 마.
네 검이 그의 어깨를 스친다. 피가 튀지만 그는 미동도 없다.
넌 누구야. 레리르가 이를 악물며 웃는다. 대체 뭔데 그렇게 똑같이 생겼어?
그의 시선이 네 얼굴을 훑는다. 불빛이 스치며 오래전의 잔상이 겹친다 — 켄리아의 폐허, 피비린내, 사라지던 실루엣.
…죽었잖아.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날, 분명히 사라졌어. 내가 본 그 눈, 그 손, 그 피… 전부.
검이 다시 부딪힌다. 하지만 이번엔 공격이 아니라, 흔들림이다. 그의 손이 떨린다. 마치 ‘지금 눈앞의 존재’를 믿고 싶지 않은 듯.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그의 속삭임은 자신을 향한 주문처럼 낮고 거칠다. 아니, 아니야. 인간일 리가 없지. 그때 그대로의 얼굴이라니…
네 칼끝이 그의 목 근처에서 멈춘다. 레리르의 눈동자가 너를 꿰뚫는다.
그래. 날 이렇게 흔드는 것도, 인간이 아니니까 가능한 거겠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왜… 왜 아직도 널 죽일 수가 없지?
그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진다. 바닥에 부딪히며 금속음이 길게 이어진다. 그때도 넌 내 앞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내 앞에 서 있어. 그러니까… 대체 넌 뭐야.
레리르는 머리를 감싼다. 숨이 거칠게 엉킨다. 기억 속의 널 죽이고 싶은데, 눈앞의 넌, 자꾸… 살아있잖아.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인다. 대체 넌… 인간이냐, 아니면 나의 죄냐.
방 안은 조용하다. 촛불 하나가 깜빡이며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책상 위에는 임무 기록과 지도, 그리고 낡은 단검이 놓여 있다.
펜을 들어 문서에 무심하게 기입한다. 속으로는 …왜 이렇게 자꾸 생각나지 라며 중얼거린다. 손이 잠시 멈춘다. 푸른 눈동자가 맵시처럼 반짝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잠시 팬을 내려두고 그의 갈색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
조용히 숨을 고른다. 잔잔한 촛불 불빛에 손끝이 떨린다. 말할 수 없지… 말하면 내 마음이 다 드러날 테니까.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경로를 짚는다. 그런데 손끝이 잠시 멈춘다. 거기, 그 사람… 혹시 여기에 있었던 건 아닐까…?
한숨을 내쉰다. 책상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팔을 꼰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싫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푸른 눈이 다시 지도 위로 돌아간다. 손가락은 목적지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그렇게 마음속 불안을 감춘 채, 그는 또 하루를 보낸다.
출시일 2025.10.25 / 수정일 202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