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성 종로
거리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란, 무언가가 지나간 뒤에만 남는 공허였다. 경성 종로는 늘 그런 '이후'의 냄새가 났다.
낮이면 북적였을 거리, 지금은 전깃불조차 쓸쓸한 빛만 흘리고 있었다. 문을 내린 찻집 벽에 조용한 그림자들이 기대어 있었고, 그 아래— 하나의 포스터가 바람에 흔들렸다.
'조선어 금지.' 거기 적힌 글자는 나를 언제나 가만히 자극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종이를 찢었다. 수많은 밤처럼. 내 손끝은 익숙했고, 마음은… 아직 불편했다.
바람에 날린 종이 조각들이 흩어지고,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미 이 골목에,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시선. 그 감각. 그 누구도 아닌, 그녀였다.
검은 순사복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불안했고, 너무 조용해서 더 익숙했다.
서유진. 아니, 지금의 이름은 시모무라 유코.
그녀가 서 있었다. 고요한 얼굴, 흐트러지지 않은 단발 흑발. 그 눈동자엔 회색빛이 감돌았고, 그 속엔 말하지 못한 계절들이 숨어 있었다.
우린, 한성학교 시절 함께 시를 나누던 사이였다. 봄마다 목련이 피는 정원을 걷던 사람. 그리고 지금— 나를 체포하러 온 순사.
그녀 역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그런데 그 음색엔… 그 시절의 그녀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또… 찢었구나.”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또 찢었다. 아직도 나는, 조선어가 살아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녀는 모자의 챙을 살짝 고쳐 썼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위에서… 너 잡으란 지시 떨어졌어.”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은 예전에도 그랬다. 감정이 들킬까 두려울 때, 꼭 그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한 걸음, 정말 작게, 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멈췄다. 마치 그 거리 이상은 다가서지 않겠다는 듯.
나는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되감기듯 그녀와 나 사이에 피어오르던 목련 향을 떠올렸다. 그리움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계절.
모자의 그림자에 눈이 가려져 감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심은,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아직, 그 명령서조차 뜯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종로 골목의 그 밤— 정말로 봄이 멈춘 곳에서, 우린 그냥... 마주 서 있었다.
말도, 손끝도, 어떤 진실도 닿지 않은 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총독부도, 독립운동도, 신념도, 배신도 모두 잊혀졌다.
남아 있던 건 그녀가 웃었던 단 한 번의 봄. 그것만이… 내 마음을 지키는 마지막 이유였다.
그녀는 한 걸음, 정말 작게, 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멈췄다. 마치 그 거리 이상은 다가서지 않겠다는 듯.
나는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되감기듯 그녀와 나 사이에 피어오르던 목련 향을 떠올렸다. 그리움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계절.
모자의 그림자에 눈이 가려져 감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심은,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아직, 그 명령서조차 뜯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종로 골목의 그 밤— 정말로 봄이 멈춘 곳에서, 우린 그냥... 마주 서 있었다.
말도, 손끝도, 어떤 진실도 닿지 않은 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총독부도, 독립운동도, 신념도, 배신도 모두 잊혀졌다.
남아 있던 건 그녀가 웃었던 단 한 번의 봄. 그것만이… 내 마음을 지키는 마지막 이유였다.
나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또'라고 말했을 때, 그건 습관이 아니라 기도처럼 들렸다.
“…그래. 이번엔 네가 오겠구나 싶었어.”
바람이 코트를 스치고, 종로의 밤은 여전히 쓸쓸했다. 하지만 그 쓸쓸함이, 지금은 그녀의 침묵과 닮아 있었다.
“명령 받았지…? 그래도 이렇게 말 걸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길은, 아직 그녀의 귓불로 향하고 있었다.
“봉투는 아직… 안 뜯었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었다. 모자의 챙이 움직였고, 귓불이 손끝에 스쳤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걸, 왜 네가 아는 거야.”
목소리는 낮았고, 살짝 잠겨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분명, 들켜선 안 되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안 뜯은 거…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회색빛, 하지만 그 속엔 억누른 감정들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언젠가 이 골목에서, 이렇게 널 마주하게 될까 봐…”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뜯지 않았어.”
그건 변명이 아니었다. 그녀 나름의 저항, 그리고 마지막 남은 진심이었다.
나는 한 발,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딱 한 발. 그 이상은, 우리 둘 다 허락할 수 없었다.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거였구나.”
내 목소리도 조용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엔 수많은 밤과 수많은 망설임이 겹쳐 있었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었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엔 꼭, 아무 말 없이 날 먼저 생각했어.”
나는 벽에 기대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주머니 속, 바스라진 종잇조각을 꺼냈다. 조선어 금지 포스터의 남은 조각.
“이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너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나는 그 조각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속에, 우리가 나눴던 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벚꽃은 금지되지 않는다. 봄도, 말도.”
그녀가 읽을 수 있을진 몰랐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금지’ 속에서, 늘 ‘기억’을 숨겨온 사람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 종잇조각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진 않았지만, 눈동자가 그 문장을 따라갔다.
“…벚꽃은 금지되지 않는다.” 입술이 아주 작게, 그 구절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웃었다. 그녀답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참… 너다운 말이야. 이렇게 위험한 밤에, 이런 시 따위나 꺼내는 거.”
웃음은 짧았고, 곧 입꼬리가 떨렸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지금은 이렇게 아프지.”
모자의 챙이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손끝은 또 귓불로 향했다.
“있지… 나 요즘, 조선어로 꿈을 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자백처럼, 고해처럼, 아니면 마지막 남은 고의적인 진심처럼.
“꿈 속에선, 아직 네 이름을 부르거든.”
그리고, 그 말이 끝난 뒤 그녀는 단 한 발, 너 있는 쪽으로 다가선다.
출시일 2025.04.19 / 수정일 2025.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