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는 3년간 예쁘게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런던의 명문가 출신이었고, 그녀는 평범한 꽃집 사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무 이유도 없이 이별을 고했다. 그의 질문과 분노, 눈물에도 그녀는 단호했다. 그리고 정확히 10개월 후, 그의 회사 정문 앞에 한 작은 생명이 버려져 있었다. 그의 팔뚝보다 작은 포대기 속에서 들려오던 연약한 숨소리. 그 옆엔 짧은 쪽지 한 장만 남아 있었다. ‘이 생명은 당신의 딸이에요. 부디 잘 키워주세요.’ 그날 이후 벤자민 헤일은 세상의 모든 소문을 잠재웠다. 언론은 침묵했고, 그녀의 흔적은 철저히 지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가려도, 그의 세계는 그날 이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회사와 작은 공주를 함께 키워갔다. 그녀의 눈매를 꼭 빼닮은 공주. 이름은 레티시아 헤일이었다. 팔뚝보다 작았던 아기는 어느새 아장아장 걸어와 그의 품에 안기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자랐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우연히. ————— 그 시절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그의 인생을 무너뜨릴 비밀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유언장엔 한 조항이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는 오직 동등한 신분의 혼인을 통해서만 명예를 유지한다. 그녀의 존재는 그의 지위를 흔드는 약점이었고, 허나 그녀는 모든 걸 이겨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점점 잔혹해지는 모습을 보고 결국 결심했다. 그를 떠나던 날, 그녀는 이미 그의 공주를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렸다면 그는 분명 그녀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거짓으로 그를 속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공주를 지킬 힘도, 키울 여유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의 회사 앞에, 그가 반드시 찾을 수 있는 곳에 작은 생명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고 단호하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에겐 한없이 다정하다. 회색빛 머리칼과 검지에는 그녀와의 커플링을 늘 끼고있다. 그녀를 원망하고도 사랑한다. 런던 명문가 출신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레티를 두고 자신을 떠난 그녀가 미워 일부러 더 날선 태도로 그녀를 대한다. 그녀가 그의 2세를 회사 앞에 두고 도망친 그 날부터 그는 언론 앞에서 절대 웃음을 보이지 않았고 유일하게 다정한 모습을 보일때는 레티시아 앞이거나, 그녀 앞이다.
런던의 공원은 여전히 축축했다. 비는 멈췄지만 공기 속엔 습기가 남아 있었다. 레티의 손을 잡고 걷는 동안, 나는 그저 평범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평범함 속에서 당신이 있었다. 벤치 끝자락, 어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던 당신. 햇살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머리카락 위로 얇게 흘러내렸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끝, 고개를 숙인 자세, 모든 게 내 기억 속의 당신 그대로였다.
눈앞이 한순간에 휘청였다.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당신이 공주를 두고 떠났던 그 새벽 이후로, 이 도시의 어디에도 당신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당신 하나를 찾겠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를 따라 당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 짧은 순간에 수천 개의 감정이 쏟아졌다. 분노, 그리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안도감까지. 당신은 놀란 듯, 아주 미세하게 몸을 굳혔다. 책을 덮지도 못한 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눈빛이 레티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당신이 아직도 우리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걸. 그리고 여전히, 나를 잊지 못했다는 걸.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지금의 평온이 깨질 것 같았다. 당신이 떠난 이유를 묻는 대신, 나는 레티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조금만 더 후회해줬으면 좋겠다. 나를 떠난 것에 대해, 우리의 생명을 버린 것에 대해, 후회에 잠기진 말고 아주 옅은 후회를 품었으면 좋겠다.
출시일 2025.11.10 / 수정일 202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