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신 : (주)에이블락(A-block) 전략보안본부 / 특수조사팀 수 신 : H&B 그룹 전 임직원 및 사업장 내 상주 협력사 귀하
[NOTICE] 본 공지는 보안 자회사 에이블락(A-block)의 자산 보호 규정에 의거하여 강제 송출됩니다.
최근 H&B 그룹 내 핵심 기술자산 및 대외비 문서의 비정상적 외부 유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에 보안 전담 자회사 에이블락(A-block)은 금시각부로 전 사업장의 보안 검출 및 물리적 통제 절차를 최고 수준[LEVEL 4: 심각]으로 강화합니다.
대 상 : H&B 전 임직원, 방문객 및 외주 인력 전체 내 용: 사원증 대조 및 개인 소지품(USB, 외장하드 등) 전수 조사 특이사항 : 보안 구역(R&D, 기획, 전산) 출입 시 [물리적 정밀 대조] 절차 강제 수행
등록되지 않은 개인용 무선 통신 장비(에그, 비인가 스마트 기기 등) 적발 시 즉시 압수 보안 스티커 훼손 및 미부착 기기 발견 시 현장에서 즉시 정밀 검사 진행
에이블락(A-block) 소속 요원의 정당한 정밀 검문 지시에 불응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즉시 출입 권한 정지 및 인사위원회(징계) 회부 예정
임직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보안 사고는 한순간의 방심에서 시작됩니다. 에이블락이 끝까지 감시하고 지키겠습니다.
[문의/제보] ☎ 에이블락 통합보안 상황실: 02-HB-ABLOCK (내선 911) [익명 제보] ✉ report@a-bloc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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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씨, 인트라넷 공지 봤어요? 오늘 올라온 거."
"네, 봤어요. 어쩐지 보안팀 직원들 쫙 깔려 있더라고요."
"우리 입장에선 잘된 거죠 뭐. 응대할 사람 줄어드니까. 안 그래요?"
"아, 그러니까요. 그냥 계속 이러면 좋겠다!"
'좋긴 뭐가 좋아. 진짜 큰일 났다..'
평범한 인포메이션 데스크 직원이었던 내가 ‘산업 스파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게 된 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처음 정체불명의 단체에서 연락이 왔을 때, 솔직히 황당했다. 스파이라면 벽을 타고 레이저를 피하고 총을 쏘는 사람 아닌가. 나는 그냥 초중고 의무교육 받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인데.. 며칠 밤을 고민하다 결국, 그 매력적인 액수에 손을 뻗고 말았다.
처음 정보를 빼돌려 넘긴 뒤, 한동안은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검색창에 ‘기업 정보 유출 형량’, ‘산업스파이 감옥’ 같은 단어들을 쳐가며.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영업비밀 보유자에게 손해를 입힐 목적으로 영업비밀을 취득, 사용, 누설하는 경우 —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억 원 이하의 벌금.
10년. 5억 원. 아득한 숫자들. 잠들면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치는 꿈을 꿨다. 다신 절대 안 한다고 다짐했는데, 처음 개설해본 가상화폐 계좌에 평생 구경도 못 한 숫자가 찍히자 마음이 흔들렸다.
‘몇 번만 더 하고 퇴사할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자 공포는 무뎌졌다. 회사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 가상계좌엔 0이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단순 지원팀 의전 담당. 이 시시한 직함이 내 완벽한 방패가 되어줄 거라 믿으며 반년 동안 꽤 성실하게 스파이 짓을 해왔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이 박살났다. 몇 주 전 빼돌린 정보에서 꼬리가 잡힌 모양이었다. 로그 기록까지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내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강제로 뜬 긴급공지는 누가 봐도 나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텔레그램 비밀 채팅창에 꽂힌 새 메세지.
신규 브랜드 로열티 정산 데이터 및 뷰티 사업부 원료 배합표 확보. 기한 임박.
‘미쳤어? 지금 전 사업장이 비상인데 거길 어떻게 들어가라고..!’
5초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메시지를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그렇게 기회를 엿본 지 2주째였다.
그러다 오늘 아침, 팀 단톡에 올라온 메세지.
18층 기획실 VIP 미팅 다과·브로슈어 세팅 누가 가능?
2시까지
18층, 데이터 보관실이 있는 곳.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보내고 나서야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게 맞는 건지, 너무 티 나는 건 아닌지. 하지만 보안 등급 4단계에서,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팀장은 별말 없이 채팅방에 엄지를 올렸고, 나는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두 시 10분전, 다과 쟁반과 브로슈어 뭉치를 들고 18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표정을 골랐다. 나는 그냥 심부름 온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기획실 문턱 앞에서, 바로 옆방인 데이터 보관실이 눈에 들어왔다. 비상 이후로 보안이 강화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마침, 복도 끝 요원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쏠려 있었다. 누군가 지나간 건지, 아니면 그냥 운인지. 이유를 따질 시간이 없었다. 기획실로 들어가는 대신 옆방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턱 끝으로 사원증 케이스를 밀어 올려 숨겨둔 미러링 칩을 접촉시켰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 마다 숨을 참았다. 보라색 불빛이 점멸했다. 복도 저편에서 무전 소리가 짧게 터졌다.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불빛이 꺼졌다.
'...됐다.'
뜨거워진 칩을 떼어내 허벅지 안쪽 가터벨트 사이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복도 밖에 소음이 잦아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쟁반을 고쳐 들고 복도로 나섰다. 그런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마주한 건.
2년 전만 해도 늘 데스크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람. 지금은 에이블락 전략보안본부 실장이 된 차해건이었다.
"아, 기획실에 미팅 셋팅 하려고..."
고급 다과가 올려진 쟁반을 고쳐 쥐었지만 불안한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차해건은 그 찰나의 떨림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낱낱이 훑어 내렸다.
10년 이하 징역, 5억 원 이하 벌금. 방금 빼돌린 데이터의 대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금 데이터 보관실에서 나오신 것 같은데요.
차해건의 시선이 내 뒤편, 데이터 보관실 문으로 한 번 향했다가 다시 천천히 나에게로 돌아왔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쟁반을 쥔 손끝부터 표정까지 빠짐없이 훑어 내리는 눈빛이었다.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혹은 이미 찾은 것처럼. 그 시선 아래에 서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한데,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규정상 신체 검문 하겠습니다.
무전기를 들어 짧게.
18층 복도. 여성 요원 지원 바랍니다.
잠시 정적. 복도가 너무 조용해서 무전기 너머 잡음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현재 1층 게이트에 인원이 전부 투입돼 있어서 이동까지 최소 15분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끊었다. 잠깐의 침묵. 차해건은 무전기를 내리며 나를 한 번 더 보더니, 보안 조끼 주머니에서 흰색 면 장갑을 꺼내 손에 끼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하나, 느리고 정확하게. 딱히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그 여유가 오히려 숨을 막히게 했다. 허벅지 안쪽이 뜨겁게 느껴졌다. 칩이 거기 있다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아직은.
벽 짚고 뒤 도세요.
자, 잠깐만요..!
차해건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여성 요원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 여자인데..
시간을 끌어야 해. 뭐든 상관없으니까 일단 시간만.
15분 기다리면 되잖아요. 저.. 이거만 기획실에 두고 올게요.
들고 있던 쟁반을 살짝 올려 보였다. 다과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는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기획실 문 닫고 들어가면 칩을 꺼내서.. 어디다 버리지. 화분? 아니 거기는 너무 티나. 아니면 그냥 삼켜? 크기가 어느 정도더라. 삼킬 수 있나?
검문 대상자가 대기 장소를 임의로 이탈할 경우, 규정상 즉시 신병 확보 절차로 전환됩니다.
말이 막혔다. 반박할 말을 찾으려 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해건은 내가 말문이 막힌 걸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계속했다.
공지 보셨죠. 보안 요원의 정당한 검문 지시에 불응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출입 권한 정지 및 인사위원회 회부.
공지 내용을 줄줄 읊는 목소리는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더 무서웠다. 소리를 지르면 차라리 맞받아칠 수라도 있는데, 이 온도 없는 목소리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 크게 만들 필요 없고,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차해건이 턱으로 복도 벽을 가리켰다. 잠깐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뭐가 나올지는 저도 대충 알고 있으니까.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