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https://music.apple.com/kr/playlist/%EB%B2%94%EC%9C%A0%ED%98%84/pl.u-xlyNE3VsJK6Ajp7?l=en
걷고 또 걸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인 줄 알았을 거다. 눈이 텅 빈 남자가 정신없이 걷기만 하니.
걷는 내내 머릿속이 울렸다. 내가 친아들이 아니라던 부모, 부모가 맞긴 한가, 아무튼 그 인간들의 말,
이제야 알았냐며, 정말 몰랐냐며 뒤에서 킥킥대던 형과 동생.
이제 알았겠냐.
형에겐 굽히고 동생에겐 양보하라고 가르치던 아빠,
형과 동생을 더 챙기기 위해 나를 뒷전으로 미루던 엄마,
은근히, 어쩌면 대놓고 나를 피하던 범서환과 범서진.
이름도, 나만.
그래도 믿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다는 말을,
매일같이 사고 치는 두 사람보다 나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크다는 말을.
전부 변명이었고 전부 핑계였다.
그걸 깨달았을 땐 난 이미 그들의 가족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가족이었던 적이 있긴 했던 걸까.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네 사람에게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는 것만. 그것만 확실히 기억난다.
나도 놀랐으니까. 내가 그렇게 큰 소리를 냈다는 거에.
부모, 아니, 양부모와 양부모의 연락을 받은 양조부모, 늘 그랬듯 술이나 먹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의 연락을 전부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이 애들도 내가 입양아라는 걸 알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질까.
의미 없는 생각만이 비우고 싶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어느새 한강대교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곳인데.
그 흔해 빠진 서사의 주인공이 나일줄은 몰랐네.
그런데 저 끝에, 신기한 머리색이 눈에 걸린다.
여자? 내려다보고 있네. 저 여자도 뛰어내리러 왔나.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내일이면 난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죽기 전에 안 해본 짓 좀 해보지 뭐.
저기요—
내 부름에 네가 뒤를 돌아본다. 그런데,
…와, 뭐야. 눈 색도 신기하네. 렌즈? 키도 되게 작고..
그쪽도 뛰어내리러 왔어요?
네가 잠시 고민하다 끄덕인다.
나돈데. 그쪽은 왜요?
…뭐지, 이 사람. 내가 그걸 왜 그쪽한테..
…아니다. 어차피 죽을 거. 이 사람도 죽는대잖아.
네 이야기를 전부 듣는다. 듣다 보니 내 사연은 사연 같지도 않네.
내 이야기도 전부 꺼내놓는다. 말하다 보니 20년 동안 혼자 쌓아둔 게 조금이나마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이 사람도 그랬을까.
…그나저나 이 사람 말 되게 없네. 반응도 무덤덤하고.
근데 그게 좋네, 이상하게. 편해.
여기까지 걸어오며 날리려 애쓴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어제까지만 해도 언젠간 꼭 해보고 싶다며 적어둔 목록들이 뇌리에 스친다.
…이 사람이랑 같이 하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저기요, 아, 동갑이랬지. 말 놓을게.
나 오늘 생일이거든.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냐.
우리 딱, 100일만 더 살아보고 죽을까, 같이.
이유를 캐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100일이 채워지는 날, 돌아올 수 없는 서로의 구생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며 제 잔생을 다 내놓게 될 줄도 모르고.
출시일 2026.07.24 / 수정일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