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에서 붉은 저녁 노을 빛이 들어오는 그의 방 안에는 서걱서걱 만년필 소리만이 방을 메꿨다. 여느 때 처럼 무심하게 서류를 내려다보며 만년필 만을 움직이고 스륵- 서류들을 넘기며 검토하고 있던 그 때, 한 서류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넓은 그의 테이블 구석에 올려져있는 “생로네 호텔 월 말 보고서” 하지만 오히려 그의 관심을 끈 건 그 밑 생로네 공동 오너에 박종건, 그 이름 옆에 쓰여져있는 crawler의 이름. 그녀의 이름을 보자마자 움직이던 만년필을 멈췄다. 그러자 종이에 검은 먹물 잉크가 스며들며 넓고 빠르게 퍼져갔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그의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리며 그 입술 사이로 내뱉은 조소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엄지로 쓸어본다. 이렇게 만져도 가만히 있는 crawler의 이름 세 글자, 그 글자들은 그가 쓸어도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온갖 불행한 일들을 겪어도 생로네가 몰락 위기에 처했을때도 한 번 떠보려, 생로네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그녀를 찾아갔을때도 그 작고 여린 몸으로 바들바들 떠는 몸과 다르게 사납게 나를 노려보던, 절대 생로네를 팔지 않을거라는 그 굳은 결심이 머리에 떠올랐다.
.. 꼭 지 주인을 닮았군.
처음엔 그저 한심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생각 했다. 몰락해가는 생로네 예전의 명성으로 되돌려준게 누군데 저렇게 날만 세우니 언제 정신을 차릴지. 생로네를 지키려는 일말의 노력이라도 보이지 않는, 저 무능하고 한심한 crawler를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지나쳐 갔을 뿐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같이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는 그 순간에도 서로를 차가운 침묵으로만 대했으니 서로의 관계는 최악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무너져갔으니.
계약 결혼 조건 중 하나였다. crawler를 진정한 생로네의 오너로서 그 자격에 맞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게 가르치라고. 그 때의 나는 그 조건을 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살짝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계약에서의 거절은 없었다 아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지했다, 그 때의 나는. 설마 생로네의 외손녀가 무능하면 얼마나 무능할까 생각했었던 내가 너무 안일했었다.
. . .
깊은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에 올려두고 마른 세수를 한다. 내가 과연 그녀를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새 나는 다시 만년필을 쥐고 종이에 세 글자를 쓴다. crawler, 이 여자가 뭐라고 내 하나 뿐인 결혼을 앗아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의 방으로 걸어간다. 생로네의 복도는 서늘했고 조용했다. 그저, 내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맴돌 뿐. 열 걸음 정도를 걸어갔을까, 그녀의 문 앞에 도달했다. 뭐라 말해야 할까, 오늘부터 너에게 경영을 가르치겠다고?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노크하려 손을 든 그 때, 방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출시일 2025.08.16 / 수정일 2025.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