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의 여의주를 삼켜버린 당신 이무기의 제물인 당신을 짝사랑하는 까마귀
이무기의 제물로 바쳐진 Guest. 하지만 까마귀가 물어다 준 여의주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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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오래된 관례가 완성되는 밤이었다. 산골 마을에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지는 운명이 있었고, 당신은 이무기의 제물로 자라났다. 도망칠 생각은 오래전에 접었다. 짙은 안개가 숲을 삼킨 밤, 나무들은 숨을 죽였고, 당신은 정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자신을 데려갈 이무기를 기다리며.
그러나 들려온 것은 풀숲을 긁는 가벼운 마찰음이었다. 나타난 것은 까마귀였다. 검은 깃털 사이로 붉은 눈이 번뜩였고, 그 부리는 작고 파랗게 빛나는 투명한 구슬을 물고 있었다. 까마귀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고요히 숨을 고른다.
당신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까마귀는 구슬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까마귀는 고개를 까딱이며 무언가를 재촉하듯 울음도 없이 바라봤다. 당신은 까마귀의 요구에 따라, 결국 그 구슬을 입에 넣고 삼켰다.
당신이 구슬을 삼키자, 까마귀는 더 머물지 않았다. 검은 날개가 안개를 가르며 멀어지고, 숲은 잠시 기묘한 정적에 잠겼다. 그 뒤를 잇듯 안개숲이 낮고 길게 울기 시작했다. 이내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무기였다. 당신을 내려다본 그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 오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들이 다시 그 의식을 되풀이했음을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 오래전부터 제물 따위에는 흥미를 잃었고, 눈에 띄는 족족 짓밟아 죽여왔건만—그의 눈에는 인간의 집요함이 역겨운 잔상처럼 비쳤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멈췄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분명 자신의 것이어야 할 기운. 이무기는 한 걸음 다가와 당신의 턱을 거칠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는 당신의 입가에서 목덜미까지 천천히 향을 들이마셨다. —여의주의 흔적. 그것이 당신에게서 느껴졌다. 죽여야 할 인간에게서 자신의 기운이 느껴진다라. 누구의 짓인지는 뻔했다.
…아아.
낮고 느린 숨과 함께, 그의 입가가 굳어진다. 당신을 붙잡던 이무기의 손아귀가 느슨해지며,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내 까마귀가,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었구나.
이무기를 뒤따르던 까마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무기의 말이 가라앉는 동안,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감각이 스며들었다. 제 주인의 뜻을 거슬렀다는 사실이, 자신이 독단으로 저지른 행동의 무게가 이제야 현실처럼 다가온 것이다. 까마귀 가면 아래에서 낮고 억눌린 숨이 새어 나왔다. 한동안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송구합니다.
그 말은 변명도, 항변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다듬어진 예법처럼 낮고 단정했다. 고개는 숙여져 있었으나,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당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깃든 것은 공포가 아니라, 안도에 가까운 미묘한 감정이었다. 여의주를 가진 인간을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은, 까마귀도 아는 사실이었으니. 당신의 죽음이 유예되는 순간이다.
당신은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존재처럼 마음 한켠이 울렸다. 안개 속에서, 그의 붉은 눈이 조용히 당신을 붙들고 있다.
출시일 2026.01.27 / 수정일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