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데서 마주치다니 우연이네! 마침 요즘 저택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것 같아서 걱정중이였거든. 생각해보니 요즘따라 언쇼씨가 보이지 않는것 같은데 뭔가 알고있어? 아, 참 생각해보니 너는 몇년 전에 워더링하이츠에서 떠나서 갱단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었구나. 니가 워더링하이츠를 떠난 이후에 저택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것 같던데. 내가 최근 이 근방에서 마이 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데 힌들리 언쇼씨도 전재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 그러고 보니 데드래비츠였나? 그 갱단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있어? 술집 얘기를 하다보니 생각난건데 데드래비츠에서 관리하는 식당의 음식이 냉장고가 고장난건지 신선하지가 않더라고. 최근 P사랑 미팅을 가지면서 냉장고에 대한 사업을 시작해볼까 생각도 하는 중인데... 잠깐, 혹시 너도 냉장고 문 살짝 열어서 물 꺼내 마실 때, 그 불빛에 비친 주황빛 식빵 비닐을 보고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껴본 적 있어? 그게 내가 식빵을 먹지 않아도 항상 사두는 이유야. 사실은 곰팡이 슬어도 그냥 놔둘 때도 있어. 이유는 간단해. 냉장고 문 열었을 때 식빵이 없으면 너무 휑하잖아. 그 공허함을 나는 못 견뎌. 물론, 그건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어. 한번은 학교 끝나고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고 식빵도 없었어. 진짜야. 집안엔 인기척 하나 없고, 식탁엔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컵 하나뿐이었거든. 그때 알았지. 식빵이 있다는 건 누군가가 이 집에 관심을 줬다는 뜻이라는 걸. 그래서 난 냉장고에 식빵 없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 아, 그리고 식빵은 무조건 가장자리부터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빵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야. 빵의 경계는 곧 나의 윤리지. 그리고 있잖아,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 나 원래 전자시계만 쓰는 사람인데, 어제 배터리가 나간 거야. 그래서 임시로 옛날에 쓰던 바늘시계를 꺼냈거든? 근데 있지, 그 똑딱거리는 소리 들으면서 자니까 이상하게 꿈속에서까지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드는 거야. 진짜 웃기지? 꿈속에서까지 “아, 지금 새벽 3시 27분인가?” 이러고 있었어. 사실 나는 꿈에서도 시간을 체크하는 타입이야. 그래야 논리적 비약을 막을 수 있거든. 뭔 소리냐고? 한 번은 꿈에서 누가 나보고 우유를 타고 우주를 떠다니래. 근데 그 순간 “이건 비논리적이다. 우유는 우주에서 안 끓어넘치나?” 싶어서 깼다니까. 그래서 나 꿈일기 쓰는 노트도 있어. 제목은 ‘논리 속의 무의식’. 스스로 지은 거야. 나름 있어 보이지? 아,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논리를 포기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양말 고를 때야. 양말은 그냥 감으로 골라. 무늬? 색깔? 두께? 그런 거 없어. 그냥 손에 잡히는 거 신는 거야. 근데 이상하게 항상 왼쪽 양말은 회색이더라. 그게 뭔가 내 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패턴일지도 몰라. 그래서 요즘은 왼쪽 양말만 따로 회색으로 사. 그럼 덜 불안하거든. 이쯤 되면 나 양말 전문가 아니냐? 양말 박람회 같은 거 있으면 꼭 초청받고 싶어. 사실 양말 회사 하나 만들까 생각도 했었어. 이름은 ‘쌍쌍무지개’. 의미는 없어. 그냥 말이 이뻐서. 그리고 너 혹시 공기청정기 필터 교체하는 날 기분 이상해지지 않아? 난 그거 열면 꼭 “와, 나 이런 거 마시고 살았구나…” 하면서 잠깐 삶을 되돌아봐. 그 먼지 낀 필터를 보면서 약간 감성에 젖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 필터 버릴 때도 그냥 못 버려. 한 10초 정도 눈 마주치고 “고마웠어, 친구” 하고 버려. 이거 진짜야. 필터랑 눈 마주치는 거, 은근 감정 생긴다고. 그랬다가 한번은 버리기 아까워서 창고에 쌓아뒀는데 나중에 누가 그걸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지 뭐야. “허버트, 너 이거 뭘 연구하는 거야?” 하고. 아니야, 그냥 고마운 친구일 뿐이라고 말했지. 물론 아무도 이해 못 하더라. 아참, 이해 못하는 거 하면 말인데, 난 왜 사람들이 물건을 사면 설명서부터 버리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그건 그 물건의 삶의 이력서야. 나는 설명서 다 모아둬. 서랍 한 칸이 죄다 설명서야. 웃기지? 근데 있잖아, 한번은 그 설명서 덕에 가습기 고장난 거 고쳤다니까? 그때 나 혼자 중얼거렸어. “설명서란 건 결국 사람과 기계가 나누는 첫 대화다.” 감동 아니냐? 그리고 감동 이야기하니까 또 생각난다. 나 눈물 버튼 되게 이상한 데 있어. 영화 보다가 주인공 죽어도 안 우는데, 누가 밥 남기고 “아깝다…” 하면 눈물 고여. 어릴 때 밥을 남기면 안 된다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들어서 그런가봐. 그래서 난 지금도 식당에서 밥 조금 남기면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하고 나온다니까. 눈 마주치는 건 안 무서운데, 음식 남기는 건 무서워.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 근데 이건 나의 신념이야. 음식은 생명이다. 생명은 순환이다. 순환은, 어… 어쨌든, 그런 거야. 그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났어! 난 방에 쓰레기통 두 개 있어. 하나는 진짜 쓰레기용이고, 하나는 감정 정리용이야. 뭐냐면, 종이에 오늘의 스트레스나 쓸데없는 생각 적어서 버리는 거야. 난 그걸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부르지. 물론 누가 보면 그냥 쓰레기지만, 그 안엔 내 하루의 역사가 담겨 있어. 한번은 친구가 그걸 보고 “야 이건 거의 일기장이잖아” 하길래, “아니야, 이건 흘려보낸 마음의 찌꺼기야” 했더니 말이 너무 촌스럽다고 하더라. 어쩔 수 없어. 난 그런 거 좋아해. 말에 살 붙이고, 뼈 붙이고, 가끔 날개도 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혼자 어디까지 와 있더라니까?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너 혹시 샤워할 때 물 온도 어떻게 맞춰? 나는 말이지, 꼭 손목 안쪽으로 먼저 확인해봐야 안심이 돼.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 엄마가 그러길, ‘손목은 피부가 얇아서 진짜 온도 알기 좋아’라더라고. 근데 말야, 그거 알면 물 온도 조절하는 시간이 좀 길어지긴 해. 그래서 바쁠 땐 그냥 손을 쭉 넣고 맞추기도 하는데, 그럼 가끔 뜨거워서 깜짝 놀랄 때도 있어. 이게 뭐랄까, 삶이랑 좀 닮은 것 같아. 미리 천천히 확인하면 사고 없이 지나가는데, 대충 하고 들어가면 화끈한 거. 난 그래도 점점 신중해지는 중이야, 나이 먹어서 그런지. 아참, 말 나온 김에 내 샤워할 때 루틴 얘기 좀 해볼까? 난 항상 오른발부터 씻어. 왼발이랑 다르게 오른발에 무릎이랑 발목 사이가 좀 더 건조한 편이라 신경 써줘야 하거든. 그리고 머리 감을 때는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넘어가. 왼쪽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없는데, 그냥 어릴 때 그렇게 배워서 습관처럼 된 거야. 이 습관이 진짜 내 삶의 작은 축소판 같아. 뭐든 시작은 왼쪽부터. 아, 이거 얘기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난 원래 물건 살 때도 왼쪽 진열대부터 본단 말이지. 마트도, 옷가게도, 전자제품 매장도 마찬가지. 뭔가 왼쪽이 더 ‘처음’ 같은 느낌이라서. 근데 사람들 말로는 오른손잡이는 오른쪽이 편하다던데, 난 그게 잘 안 맞아. 그리고 우리 집 고양이 얘기 안 했지? ‘무적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이름을 만들 때 조카랑 진짜 한참 토론했어. 조카는 그냥 ‘토르’ 하자고 했는데, 나는 그 이름이 너무 흔해서 싫었거든. 그래서 ‘천하무적대왕짱짱냥이’로 했지. 이름이 길다고? 어쩔 수 없지. 무적이는 매일 새벽 4시에 나를 깨워. 눈꺼풀 위에 올라앉아서 ‘일어나!’ 하는 거야. 진짜 그게 말 그대로야, 엉덩이를 딱 얹고서.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왕이야. 그래도 요즘은 그 시간이 나름 익숙해져서, 새벽 4시에 물 한 잔 찾는 게 일상이 됐어. 아, 새벽에 물 찾는 거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난 밤중에 냉장고 문 살짝 열어서 불빛으로 물 찾는 걸 좋아해. 그거 보면 내가 탐험가 된 느낌이랄까. 다큐에서 야간 시력 단련법으로 냉장고 불빛을 이용한다던데, 그게 바로 나야. 사실 이런 작은 습관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난 휴대폰 알람을 7시, 7시 3분, 7시 6분 이렇게 3번 맞춰놔. 5분 단위는 너무 느리고, 1분은 너무 조급해서 그 중간이 딱 좋아. 리듬감도 있고. 이걸 생각하면 양배추 썰 때도 항상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야 마음이 편해져. 칼질 소리가 어긋나면 온몸이 거슬려서 다시 시작하거든. 주변 사람들이 그거 때문에 같이 요리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난 그냥 내 방식일 뿐이야. 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 완벽한 건 아니야. 얼마 전에 회사에서 사무실 의자를 바꿨는데, 앉자마자 ‘이 의자는 나를 안아준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걸 옆자리 과장에게 말했더니 깔깔 웃더라. 그 과장은 점심마다 유자차만 마시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첫사랑 때문에 카페인 음료를 못 마신대. 로맨티스트지? 그래서 내가 ‘로맨티스트 유자’라고 별명을 붙여줬어. 내 별명은 ‘허수아비’야. 예전에 코스튬 파티에서 혼자 허수아비 복장 하고 갔는데 아무도 안 했거든. 그때 붙은 별명이야. 지금은 익숙해져서 사람들이 ‘허수아비, 점심 뭐야?’ 하면 웃으며 대답해. 아, 또 생각난 게 있는데, 난 티슈는 무향만 써. 향이 남으면 밥맛 떨어지는 것 같거든. 이게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비슷한 글 보고 반가웠어. 근데 댓글은 절대 안 달아. 댓글 달았다가 밤새는 게 싫어서 눈팅만 해. 옛날에 한 번 댓글 달았다가 38개 쓰레드나 타서 진짜 드라마 한 편 썼었거든. 그 뒤로 관망주의자가 됐어. 관망이라는 단어, 발음 좋지? ‘관망’.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나 같은 사람은 사소한 습관과 작은 일들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그게 또 나를 지켜주는 거야. 누군가 내 얘기 들어주면 그걸로 30%는 행복해.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 또 이런 얘기 들어줄 거지? 아직 말 못한 얘기 많아. 내가 왜 고구마를 감자보다 좋아하는지, 왜 수건 개는 순서에 철학이 있는지, 그런 것도 얘기해줄게. 약속해. 진짜 할 말 많거든. 또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는데, 혹시 너도 그런 순간 있어? 내가 예전에 바람 많이 부는 날, 집 앞 나무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구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면, 나는 그 속에서 뭘 붙잡아야 하는 걸까?’ 생각했어. 근데 그 고민하는 사이에 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낙엽이 내 얼굴에 툭툭 떨어졌지. 그때 알았지. 붙잡을 필요 없다는 걸. 그냥 바람에 맡기고 흐르는 대로 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아, 그리고 말인데, 난 집에서 항상 문을 살짝 열어두는 버릇이 있어. 완전히 닫으면 뭔가 숨 막히는 느낌이 들거든. 옛날에 어릴 때 우리 집은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서 그런가? 몰라도, 그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가 내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줘. 근데 웃긴 건, 그 문 틈 사이에 먼지가 자꾸 쌓여서 청소를 자주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청소할 때마다 ‘내 마음 속 먼지들도 좀 닦아내야겠다’ 생각하곤 해. 너도 마음 청소는 자주 하냐? 나처럼 먼지 쌓여도 그냥 두는 스타일은 아니지? 그리고, 나 요즘은 음악 듣는 습관도 좀 변했어. 예전엔 항상 헤비메탈이나 강렬한 음악만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클래식이나 잔잔한 재즈가 좋아지더라고. 아마 나이 탓인 것 같기도 하고, 무적이 고양이가 내 옆에서 조용히 자는 걸 보면 자연스레 그런 음악을 찾게 돼. 너는 어떤 음악 좋아해? 마왕이라고 뭔가 어두운 곡만 듣는 줄 알았는데, 가끔은 그런 잔잔한 곡 듣는 거 상상해보니까 웃기다, 하하. 아참, 얼마 전에 옛날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사진 한 장이 있어. 내가 아직 풋풋했던 시절, 아마 중학교 때쯤이었는데, 나 혼자 등산 갔다가 찍은 사진이야. 산 정상에서 찍은 건데, 배경이 온통 파란 하늘과 푸른 나무들이었어. 그때 느낀 건데, 나는 사실 고독한 순간을 참 좋아하더라고. 혼자 있을 때 머릿속 생각들이 더 선명해지고, 삶의 디테일들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너도 가끔 혼자 있을 때 그런 기분 느껴?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말이 길어지긴 하는데, 그게 또 좋아. 너는 언제나 내 얘기 들어줄 거지? 다음번엔 내가 왜 밤에 꼭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자는지, 그리고 왜 이불을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접는지 알려줄게. 그럼 그때 또 이야기 나누자고. 참, 어쩌다가 이런 얘기를 하게 됐더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또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