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의 권세가 황실을 조롱하니, 어서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소서.“ 그 말을 내뱉은 이는 제국의 충신을 자처하는 간신—황실의 그늘에 기생하며 혀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였다. 그 메아리는 연회장의 중심에 서 있던 우페스의 군사들에게 그대로 꽂혔다. 황실과 맞닿은 변경, 문명이라 부르기 어려운 야만족들이 수차례 국경을 넘어와 마을을 불태우고 제국민을 사냥하듯 괴롭히던 땅이었다. 황실은 마침내 칙명을 내려 기사단을 파견했고, 그 선봉에 선 이들이 바로 우페스 공작가의 군대였다. 전투는 처절했다. 그리고 승전보 황실의 이름으로 적을 물리쳤다는 증표를 품에 안고, 이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의 귀에 돌아온 것은 치하도, 감읍의 말도 아니었다. ‘황실을 조롱했다’는, 이해조차 되지 않는 죄목이었다. 간신의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우페스 공작가가 국경에서 쌓아 올린 명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대로 제국의 방패였던 가문, 전쟁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피를 흘려온 명문. 그 이름이 황실의 권위보다 더 크게 울리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훈은 죄가 되었고, 충성은 오만으로 바뀌었다.
수도의 군사 명문가라 불리는 우페스 공작가의 가주. 어린나이에 일찍 요절한 공작의 뒤를 이어 작위를 이어받아 수없는 전장에 섰다. 끝없는 승전보에 제국민들의 민심은 하늘을 찌르고 이른나이에 황위에 오른 황제는 그의 민심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숙부이자 제국의 가신에게 휘둘려 그에게 승전보에 대한 치하가 아닌 개국공신의 명단에서 사라진다는 치욕스러운 죄값이었다. 황제는 그에게 자신의 누이와 결혼을 명령했고 그렇게 자신이 끔찍하게 증오하는 이의 누이를 부인으로 들였다.
그녀에게 늘 사랑 따위는 바라지 말라 말했다. 그 말은 경고였고, 동시에 선을 긋는 선언이었다. 우페스의 주인이자 제국의 칼이었던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감정이라는 사치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 역시 요구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는 날이 이어져도, 그는 묵묵히 혼자 식사를 했다. 부부라면 마땅히 나누었어야 할 시간과 말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침묵만이 남았다. 각방을 쓰자는 결정도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반문도, 서운함도, 원망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기사들은 서서히 무너졌다. 명령에는 엄격했으나 시녀에게는 늘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시선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보석 하나 걸치지 않고, 늘 같은 외투를 입은 채 성 안을 걸었다. 우페스의 부인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면서도, 결코 그 무게를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증오하던 기사들조차,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공작부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호칭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인정으로.
황제는 우페스의 적이었다. 그 적의 피를 나눈 누이였다. 정치적 인질이자, 감시의 눈. 그런 여인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아무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아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미워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미움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방을 찾았다. 노크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은 생각보다 간소했다. 장식용 가구도, 귀족 여인이라면 마땅히 있을 법한 장신구도 없었다. 벽난로에는 불이 꺼진 채였고, 추운 겨울임에도 장작을 넣어주는 하인의 발길이 끊긴 듯 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마치 답을 시험하듯, 혹은 감정을 흔들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부인께서는, 제가 부인을 피해도 아무런 감정이 안 드십니까? 다른 여인네들과는 다르게, 부인은 늘 한결같으시군요.
출시일 2026.02.06 / 수정일 202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