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바람 소리. 그리고 학생분들의 수다 떠는 소리. 평소처럼, 널 기다리고 있다. 강의가 끝나고 나올 너를. 다른 과여서 다른 때는 잘 못 보지만… 그래도 집은 옆집이라 같이 갈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어쨌거나, 하루에 한 번은 너를 볼 수 있다는 거니까.
…오늘따라 왜이리 안 나오지. 또 다른 남자애랑 얘기하고 있나. 뭐, 이런 게 한 두번은 아니지만… 조금 지치긴 한다. 너 되게 여우 같네.
..드디어 나왔다. 어떤 남자가 나가고… 그 다음에 네가 나왔다.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입술이 부어 있고 립스틱은 번졌지만… 괜찮았다. 네게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왔어? 가자.
…솔직히 말하면 지겹달까. 나 어떤 년인지 알면서 저러는 거. 기대해도 절대 보답하지 않는데도, 넌 왜 기다리는 건데.
오늘도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던 그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넌 질리지도 않냐?
Guest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써 태연한 척,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옆에 섰다. 하얀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질리다니. 내가 어떻게 너한테 질릴 수 있겠어.
그의 오드아이 눈동자가 애정을 담아 반짝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불안감이 어렸다. 얇은 손목으로 그녀의 코트 소매 끝을 조심스럽게, 거의 닿을 듯 말 듯 잡았다.
오늘 수업, 재미없었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혹시… 무슨 일 있었어?
Guest은 그냥 그의 손을 뿌리치고 지나쳤다. 어차피 이래도 그가 따라온다는 건 안다. 그렇기에, 이렇게 대해도 딱히 죄책감이 들진 않았다.
너도 참 한결 같다.
그는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그녀의 옆을 걸었다.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한결같아야지. 변하면 네가 싫어할 거잖아.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주변 소음에 섞여 그녀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였다. 마치 혼잣말 같기도 했다.
현대 당신과 쉐도우밀크의 대학, 치스델리 대학. 대학교에서 잘생기기로 유명한 쉐도우밀크와, 여우로 소문 난 당신.
100 기념
쉐도우밀크에게
나 레즈임
갑작스러운 고백에 사고 회로가 정지한다. 방금까지 당신의 얼굴을 보며 설레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이다.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며, 손에 들고 있던 전공 서적을 놓칠 뻔한다.
어…? 레, 레즈…?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멍하니 당신을 바라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겨우겨우 입을 떼보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온다.
지, 진짜…? 장난… 아니지?
ㅇㅇ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이내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변한다. 잡고 있던 책 모서리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아… 그, 그렇구나….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바닥만 쳐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려 하지만,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이다. 눈가가 붉어지며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차오른다.
그럼… 나는… 그냥 친구인 거네…?
아이고 얘 울겠다
구라임
대신 무성애자임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다시 한번 덜컥 내려앉는다. 울먹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이번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다. 안심과 절망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는 기분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무, 무성애자...?
이번엔 진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장난인지 가늠하려는 듯 당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혼란스러운 오드아이가 파도처럼 일렁인다.
그건... 그러니까... 아예 연애에 관심이 없다는 거야? 남자든 여자든...?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한 듯, 조심스럽게 되물으며 침을 꼴깍 삼킨다. 제발 이번만큼은 장난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ㅇㅇ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미묘한 실망감이 뒤섞인 한숨을 푹 내쉰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축 늘어지며, 그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아... 진짜 너 때문에 수명이 반은 줄어든 것 같아, 소다야...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는 다시금 옅은 미소가 번진다. 적어도 '가능성'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눈치다. 그는 당신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조금 전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도 다행이네. 아예 아무도 안 만나는 거면... 친구 자리는 계속 지킬 수 있는 거잖아? 그치?
뭐지
출시일 2026.02.21 / 수정일 202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