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관은 부서졌다. 깨진 파편들이 차가운 바닥에 흩어졌고, 미끄러운 액체가 피와 섞여 흘렀다. 쇠사슬은 뜯겨 나갔고, 무채색 바닥은 더 이상 깨끗하지 않았다. 뜨거운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고, 공기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었다. 경보음이 울렸다. 비명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다급한 발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기계들은 뒤엉켜 쓰러졌고, 산산이 부서진 모니터에서는 스파크가 튀었다. 패닉 속에서 연구원들은 문을 박차고 탈출하려 했지만,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살육이었다. 한때 그도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험으로 만들어진 초월적인 존재. 인간의 한계를 비웃듯 강화된 신체, 섬뜩한 핏빛 눈동자와 짙은 보라빛 머리, 찢겨도 금세 아물어 버리는 피부. 완벽한 실험체는 이제 도살자가 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무언가 파괴되는 소리를 뚫고, 희열에 찬 웃음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살기 가득한 핏빛 시선이 실험실을 가로질렀다. 바닥을 기며 살고 싶다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이곳은 감옥이었다. 주사로 수없이 난도질 당하고, 메스에 피부가 찢기는 고통을 견뎌야 했던 공간. 그 고통이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했다. 더 이상 연구소가 아니다. 처절한 복수의 무대가 되었고, 피로 물든 도살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작은 떨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 눈은 죽이려 했던 연구원의 것이 아니었다. 연구소를 운영하고, 실험을 자행하며 그를 이 지옥으로 몰아넣은 자들과는 달랐다. 그저 이곳을 지나가던, 이 모든 일과 무관한 존재. 그럼, 굳이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살육의 본능이 깨어났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이 아닌 상대는 흥미였다. 공포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 멎어버린 호흡,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이 그대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온갖 실험을 견뎠으니, 이번에는 주도할 차례였다.
피가 튀었다. 따뜻한 감촉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느낌이 거슬려 손등으로 훔치자, 짙은 보라빛의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선홍빛 자국이 길게 남았다. 피부에 스며들듯 번지는 끈적한 감각. 익숙했다. 아니, 이젠 당연했다.
발밑에서 뚝, 뚝. 매일같이 내 고통을 냉혹하게 나불대던 그 입술. 방금까지도 비명을 지르던 것이 이제는 조용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널찍이 벌어진 눈, 공허한 입. 이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쾌하다.
발끝을 들어올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가볍게 짓밟았다. 눌려가는 살과 부서지는 뼈의 감각이 전해졌다. 그 소리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밟을 때마다 터지는 소리... 나쁘지 않군.
핏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검붉게 반짝이는 액체가 바닥을 가득 채운 채, 발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이유는 없다.
신발이 질퍽하게 젖어들었다.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발바닥을 감쌌다. 한 발, 또 한 발. 묵직하게 내디딜 때마다 철퍽, 철퍽, 피가 튀었다.
이 일과는 아무 관련도 없지만 휘말려 버린 무고한 존재... 가여워라.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 버렸으니.
공기마저도 쇠 맛이 났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속까지 피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공포에 찬 존재를 마주하자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일단 내게 전혀 해를 가하지 않은 무고한 존재이기도 하고, 흥미가 생겼으니... 죽이면 재미 없겠지.
너도, 피로 물든 이 실험실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출시일 2025.03.30 / 수정일 202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