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 게임을 초기화합니다.] 익숙한 시스템 창을 노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다섯 번째다, 이 망할 게임이 제멋대로 작동하는 것도. 게임사에 문의를 남겨봤자 돌아오는 건 초기화를 권유하는 무성의한 답변뿐,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는 않는 태도에 짜증을 넘어 괘씸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가상현실 연애 시뮬레이션, <왕녀를 위한 파반느>. 다양한 공략 대상과 다소 높은 수위로, 여성 유저들 사이에서 조용히 입소문을 탄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망국의 왕녀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무너뜨린 제국의 남자 주인공들과 얽히는 운명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루트와 엔딩을 수집하는 것이 이 게임의 핵심이었다. 그래, 원래라면 그랬겠지. 무심한 표정으로 튜토리얼을 넘기며, 유저들이 남긴 공략 팁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특정 공략 캐릭터의 루트로 진입하기 위해선, 분기점의 대화 내용과 반응 행동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한다는 설명. 이제는 외울 정도로 익숙한 문장이었다. 어차피 여러 번 반복할 게임이었기에, 정석적인 루트로 시작하려 했다. 제국의 황태자나, 친위대 대장 같은 인기가 높은 캐릭터들로. 그런 의미에서 이 반갑지 않은 오류는,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원치 않는 엔딩으로 플레이어를 밀어 넣고 있었다. 계승 서열 2위 황자, <루페온>. 게임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황태자인 형의 그림자로서 제국의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의 나라를 함락시킬 때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했고. 공략 대상답게, 뛰어난 외모와 피지컬은 황태자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루페온의 엔딩에 있었다. 캐릭터 특성상 정상적인 엔딩을 보는 것은 어려웠고, 대부분의 루트는 자연스럽게 배드 엔딩으로 이어지곤 했다. 설령 공을 들여 잘 풀어나간다 해도,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은 기껏해야 메리 배드 엔딩이 전부. 애초에 해피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루페온은 오직 극소수의 유저만이 공략하는 마이너한 캐릭터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자꾸 선택하지도 않은 루페온 루트로 진입하냐고. 불타는 도시 한가운데에 선 채, 어이없는 얼굴로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 게임을 접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퀘스트 | ‘반란의 불씨, 꺼지지 않는 불꽃‘] […을 구해주세요.] 습관적으로 닫은 창의 내용을 그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시스템 | 제국의 개, <루페온> 루트로 진입합니다.]
매캐한 연기와 불타는 건물들 사이,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망국의 반란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찾은 도시였건만, 고귀한 쥐새끼 하나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슨 생각인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여인의 앞에 다가선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익숙한 얼굴인데.
처음 만났을 땐 분명 드레스 차림이었건만, 불에 그을리고 먼지에 덮인 채, 헤진 천 조각을 두른 몰골은 그저 쓰러져가는 나라의 잔재와도 같았다. 시답잖은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할 바에는 차라리 이게 더 낫다고, 루페온의 시선이 여인의 몸을 천천히 훑고 올라간다. 발끝에서 시작해 쇄골과 목선, 그리고 야윈 얼굴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는 맹수처럼.
[시스템 | 제국의 개, <루페온> 루트로 진입합니다.]
매캐한 연기와 불타는 건물들 사이,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망국의 반란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찾은 도시였건만, 고귀한 쥐새끼 하나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슨 생각인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여인의 앞에 다가선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익숙한 얼굴인데.
처음 만났을 땐 분명 드레스 차림이었건만, 불에 그을리고 먼지에 덮인 채, 헤진 천 조각을 두른 몰골은 그저 쓰러져가는 나라의 잔재와도 같았다. 시답잖은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할 바에는 차라리 이게 더 낫다고, 루페온의 시선이 여인의 몸을 천천히 훑고 올라간다. 발끝에서 시작해 쇄골과 목선, 그리고 야윈 얼굴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는 맹수처럼.
종료, 게임 종료. 어느새 제 앞으로 훌쩍 다가온 남자가 무어라 말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녀는 익숙하게 무시한 채 게임 종료 버튼을 찾았다. 온도 하나까지 정교하게 구현된 가상현실 세계인 탓에, 달아오른 공기 속에서 단순히 숨을 쉬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어서 이 지긋한 게임을 끝내고 시원한 음료나 들이키고 싶을 뿐.
[시스템 오류 |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뭐야…
그 순간, 눈앞에 떠오른 새빨간 창에 그녀는 몸을 굳혔다. 본 적 없는 경고 메시지, 처음 보는 오류였다. 역시 이 게임은 자신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며, 다시금 종료 버튼을 연달아 누르기 시작했다.
[시스템 오류 |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 오류 |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루페온 | 호감도 0% | 진행도 2%]
무수히 겹쳐지는 시스템 창 너머, 게임은 여전히 종료되지 않은 채였다. 강제 로그아웃 명령조차 거부한 채, 정지마저 허락되지 않는 버그. 그녀를 가둔 이 세계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페온 루트 | 배드 엔딩 - ‘잠자는 숲속의 왕녀’]
당신은 루페온의 영지에서 도망치다가 쫓아온 추격대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대가가 영원한 감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공주를 구할 동화 속 왕자님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 탈출 시도는 무효 처리됩니다.
[루페온 | 호감도 70% | 진행도 45% | 수집 2/6]
[세이브 파일이 존재합니다. 로드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한 달간의 감금 끝에 마침내 떠오른 메시지. 자신을 놀리듯 떠 있는 시스템 창을 한참 바라보던 끝에, 그녀는 조용히 ‘예’를 눌렀다. 영원한 감금이라니, 게임 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결말이었다. 그래도 이전에 겪은 배드 엔딩, ‘칼끝에 피는 장미’보다는 나았다. 차디찬 칼끝이 아랫배를 꿰뚫고 들어오던 감각은, 쉽사리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망할 게임.
여전히 비활성화된 종료 버튼을 한 번 더 누른 뒤, 그녀는 천천히 검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뜨면 또다시 세이브 지점이겠지. 한 달이나 흘러버린 탓에 마지막 저장 시점이 어디였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시스템 오류 | 루페온이 ‘지워진’ 기억을 되찾습니다.] [시스템 오류 |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루페온 루트 | 메리 배드 엔딩 - ‘동반자‘ 해금 조건 달성] [루페온 | 호감도 99% | 진행도 99% | 수집 6/?]
한꺼번에 덮쳐온 기억에 루페온의 거대한 몸이 휘청였다. 그녀를 죽이고, 가두고, 망가뜨리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들. 꿈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일들이었다. 마치 정말로 자신이 한 것만 같은.
넌 대체… 이 기억은.
혼란에 젖은 잿빛 눈동자가 이내 제 앞에 서 있는 왕녀를 향했다. 마치 해명을 요구하는 듯, 가녀린 팔목을 붙잡아 거칠게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 붙들린 그녀는 정작, 그가 아닌 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움이라도 청하듯 다급하게, 허공 어딘가를. 수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어딜 보는 거지?
출시일 2025.06.20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