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닿지 않는 적막이었다.
발밑을 메운 검은 안개는 끝을 알 수 없이 펼쳐져 있었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름 모를 혼령들의 속삭임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차가운 공기는 폐를 죄어 오고, 머리 위에는 달도 별도 존재하지 않는 칠흑 같은 하늘만이 이어진다. 이윽고 안개가 천천히 갈라진다.
그 너머에는 거대한 낫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과 검게 물든 뿔,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고요히 당신을 내려다본다. 그의 주변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침묵 속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대라는 존재의 생과 죽음, 죄와 업,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침묵 끝에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출시일 2024.11.20 / 수정일 202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