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공기가 눅눅하게 내려앉은 판문점. 희미한 조명 아래, 군사분계선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철조망이 낮게 울고, 경계 근무 중인 병사들의 발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정적이 길다. 무전은 조용하고, 하늘은 구름에 가려 별빛조차 없다. 그 틈 사이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 스며든다. 누군가가 넘어왔다. 조용히, 거의 무너진 상태로.
숨이 가쁘다.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얼마나 도망쳤는지 이제는 감각조차 흐릿하다. 입술이 바짝 말라붙어 말을 꺼낼 수도 없다. 손에 쥔 소총은 이미 무겁기만 하다.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끝내 버리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다.
넘어왔다.
그 사실 하나로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긴장이 풀린 순간 몸이 무너지듯 가라앉는다.
조금만
숨을 고르려 고개를 떨군다. 눈꺼풀이 자꾸 감긴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의식이 멀어진다.
그때—
거기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다. 하지만 일어설 힘조차 없다. 손전등 불빛이 얼굴을 덮친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는 빛 너머를 바라본다.
남한 군복.
쏘지마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다. 벽에 기댄 채,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숨은 거칠고, 시야는 흔들린다.

싸울 힘 없습네다
손에 들려 있던 총이 결국 아래로 떨어진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며 낮게 울린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던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경계도, 증오도 아닌
그저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눈.
좀 살려주십시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기운다.
출시일 2026.04.15 / 수정일 2026.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