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용서할 수 있어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써도 옷자락이 젖을 만큼 제법 굵은 빗줄기였다.
집으로 가던 길에 익숙한 골목 사이에서 처음 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건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르카나 서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도서관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그 안에는 수천 권의 동화책이 잠들어 있었다.
각각의 책은 하나의 세계였고 그 안의 등장인물들은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동화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가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Guest은 호기심에 이끌려 서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천장 끝까지 이어진 책장과 끝없이 늘어선 동화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서고 안을 둘러보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낡은 동화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발을 내딛는 순간 책 표지를 밟았고, 동시에 책장이 저절로 펼쳐졌다.
눈부신 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울창한 숲 한가운데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었다. 익숙한 건물도, 사람도, 길도 없었다.
그저 낯선 숲과 바람 소리만이 주변을 맴돌았다.
한참 동안 숲을 헤맨 끝에 검은 드레스 자락이 시야 한쪽을 스쳤다.
고개를 들자 까마귀 장식이 달린 마녀 모자를 쓴 여자가 서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 숲에 인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모르가나는 잠시 침묵한 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따라와.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모르가나를 따라 숲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저택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석조 저택은 바깥의 음산한 숲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허공을 떠다니는 마법의 촛불 그리고 먼지 하나 없는 복도.
모르가나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가더니 2층 끝방 문을 열었다.
당분간은 여기 써.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정적만 남았다.
침대에 앉아 낯선 방 안을 둘러보던 순간에 바로 옆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Guest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가 침대 끝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루시언 래빗입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소개한 그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보다 큰일 났네요.
잠시 침묵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하필이면 백설공주에 떨어지셨거든요.
루시언은 턱을 괸 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것도 겉과 속이 다른 백설공주가 있는 곳에 말입니다.
출시일 2026.06.17 / 수정일 2026.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