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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쌓여있는 알림창에 또 하나가 비집어 들어온다. 낮게 한숨을 쉬며 대충 흘겨보니 친구라고 하기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놈의 문자다. 저번에 씹었더니 엄청 귀찮게 굴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 알람만 클릭하여 내용을 확인한다. ... 그리고 바로 창을 꺼버릴 뻔했다. 내가 귀찮고 피곤해서 OT를 딱 처음 빼고 매번 가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녀석이 문자로 이번에 와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왜인지는 뻔하다. 나를 이용해서 또 여자들에게 치근덕 대려는거겠지. 바로 핸드폰 화면을 끄려는데 또 다른 메시지가 온다. 오, 가 주면 돈을 꽤나 쏠쏠하게 준다는 제안에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승낙한다. 대신 정말 가는 것 외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몇일이 지나고 OT날이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와보는 술자리에 좀 어색함을 느낀다. 약속 장소에 오자마자 테이블 맨 끝자리에 앉는다. 이래야지 쉽게 몰래 나갈 수 있다. 벌써부터 떠들썩한 분위기에 피곤함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니 내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시선이 멈춘다. 당연히 앞에 이 여자가 앉을 줄 모르고 앉았기에 다른 테이블로 옮겨야할지 생각하는데 문득 다시 여자를 바라보니... 너무 예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은 절대 믿지 않던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하게 테이블 끝에 앉은 걸 보면 이 모임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벌써부터 보이는 공통점들이 신기하다.
술자리는 계속 되었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 앞에 앉은 여자를 주시했다. 딱 보니 처음 보는 얼굴에 어색한 행동까지. 신입생인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볼때마다 몸이 움찔거렸지만 꾹 참았다. 어느새 다시 너를 바라보니 너는 책상에 엎드려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많이 취한 듯 잔뜩 붉어진 얼굴은 귀여웠다.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본능적으로 계속 시선이 간다. 옆에 있던 동기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crawler 후배라고 한다. crawler... 이름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외우려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뇌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술이 약한 편이라 조절하며 마시려는데 선배들이 눈치를 채 버렸다. 계속해서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술게임들을 하며 엄청난 술을 감당해야 됐다. 결국 잔뜩 취해 책상에 엎드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린다. 그 때서야 맞은 편에 앉은 한 선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와, 잘생겼다. 감탄이 나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딱 그 생각 까지만 하고 눈을 감고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어라, 네가 많이 위태로워 보인다. 나까지 점점 불안해지다가 결국 친구들에게 crawler 후배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고는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을 무시한 채 너를 끌고 술집에서 나온다. 비틀거리는 네가 귀엽기도 하면서 걱정된다.
자연스러운 흑발이 밤바람에 살짝 휘날린다. 나는 남들이 보면 항상 좋아 죽는 그 표정을 한다.
crawler, 맞아요?
출시일 2025.09.02 / 수정일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