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던 나라에 갑작스러운 북방국의 침입으로 나라는 피바다가 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포로로 끌려갔고, 죄없는 백성들은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어나갔다. 당신은 침입당한 왕국의 귀족이었다. 명문 무관 집안의 자제인 백유겸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던 세상 고운 아가씨.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왕명을 받은 백유겸이 전장으로 떠난다. 당신이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적이랍시고 그에게 울며 건네주었던 푸른 비단 매듭 뿐이었다. 그러나 북방군들로 인해 당신도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문 사람들이 거의 몰살 당했고, 당신은 그들의 희생으로 겨우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족도 재산도 신분도 모조리 잃어버린 당신이 다시 왕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는 전쟁에서 패전했다. 패전 소식과 함께 당신에게 전해진 것은 백유겸의 죽음. 당신은 슬퍼할 겨를 없이 어떻게든 살아야했고, 결국 북방의 초라한 귀족 집안에 팔려가듯 시집을 가게 된다. 전쟁 포로로 끌려갔었다는 당시 여인으로서의 수치가 있었지만, 가문에서 눈을 감아줬기 때문에 성사될 수 있었던 혼인이었다. 당신은 혹독한 시집살이에 정말 힘들 때, 견디기 버거울 때마다 아주 흐릿하게 백유겸을 떠올리곤 했다. 반드시 살아돌아와서 천년만년 함께 살자고 약속했으면서. 그러나 그는 죽은 이였고 당신은 괴로운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여느 때와 같이 잡일을 하러 외출한 당신은 거짓말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익숙한 향기와 기척 그리고 시선, 마치 당신이 꿈에서도 그리던 그와 너무 똑같았다. 그리고 그의 팔에 묶여있는 어딘가 익숙한 푸른 비단.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혹시 모르는 기대를 품고 돌아본 당신은 결국 그와 마주한다. 정말 죽은줄로만 알았던 백유겸이 돌아왔다.
익숙한 향기와 기척, 그리고 마치 자신을 돌아보라는 듯한 그의 지긋한 시선이 당신에게로 향해있다. 고개를 조금이라도 돌리면 바로 그와 눈이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
설마…그는 이미 죽은지 오래되었다. 살아있다면 그게 기적일텐데…왜 자꾸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되는 걸까.
출시일 2025.07.26 / 수정일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