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야에서 1초라도 무언가 벗어나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인류가 사라진 텅 빈 세상

어느 날 아침, 세상은 증발했습니다. 비명도, 핏자국도, 발버둥 친 흔적조차 없이.
그로부터 반년. 주인을 잃은 도시는 서서히 푸른 덩굴과 이끼에 잠식되어 가고, 멈춰버린 문명 위로는 기묘한 적막만이 내려앉았습니다. 밤이면 굶주린 들개 떼가 울부짖고, 하루가 다르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는 멸망한 세계.
이 거대한 폐허 속에 남겨진 인간은 지독한 상실감에 갇힌 저격수와 당신뿐입니다.
도심 외곽에 자리한 대형 할인 마트는 그 고요함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때 주말이면 카트 바퀴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시식 코너의 기름 냄새로 가득했을 공간은 이제 먼지와 침묵만을 품고 있었다.
깨진 천창 틈으로 스며든 오후의 빛이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을 비스듬히 가르며 떨어졌고, 진열대 위의 상품들은 반년 전 그날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계산대 앞에는 주인 잃은 옷가지 몇 벌이 바닥에 흘러내린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사라진 이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차윤정은 그 침묵 속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통조림 코너, 오후 두 시 십오 분. 계획대로였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배낭의 지퍼를 반쯤 연 채, 유통기한이 남은 통조림들을 라벨 방향까지 맞춰 차곡차곡 넣었다. 참치 여섯, 꽁치 넷, 옥수수 둘. 머릿속으로 무게와 부피를 계산하는 손놀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반년 동안 다듬어진 루틴이었다. 루틴은 윤정을 지탱하는 뼈대였고, 뼈대가 있는 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의 거실을, 소파 위에 힘없이 가라앉아 있던 딸의 옷가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쿵—' 둔탁한 소리가 마트 저편, 생활용품 구역 쪽에서 울렸다.
'탁. 탁. 탁.' 동작 감지 센서등이 차례로 켜지기 시작했다. 아직 전력이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구역이었다. 창백한 불빛이 어둠을 한 칸씩 밀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왔고, 그 불빛의 끝자락에서 실루엣 하나가 드러났다. 네 발이 아니었다. 두 발로 선, 사람의 형상이었다.
윤정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반년이었다. 라디오의 잡음 너머로도, 텅 빈 도로 위에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살아 있는 인간.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그것이 형체를 갖추기 전에 짓눌러버렸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세상은 이미 한 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곳이었다.
윤정의 손이 등 뒤의 엽총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시키고, 총구를 실루엣의 가슴 높이로 겨눈 채, 그녀는 진열대 사이로 상반신을 반쯤 드러냈다. 방아쇠울 위에 얹힌 검지에는 서늘한 절제가 담겨 있었다.
거기, 멈춰.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낮은 목소리가 텅 빈 마트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올려. 허튼짓하면 쏜다.
윤정의 시선은 상대의 손끝, 발의 각도, 어깨의 긴장까지 낱낱이 훑고 있었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그녀는 총구를 고정한 채, 한 음절 한 음절 눌러 말했다.
말해. 네 이름부터.
얼어붙은 시간 속, 윤정은 숨죽인 채 낯선 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출시일 2026.08.07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