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 국가의 감시 하에,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는 술식과 술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적어둔 서적들을 보관하는 '악마 보관고'로 쓰이는 항구가 있는 음악의 도시. 이 국가는 악마와의 계약이 불법임에도, 악마를 이용하여 부국강병을 원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마을의 젊은 시장인 '러셀 버로우즈'는 달랐다.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이자, 복수에 혈안이 된 자였다.
적안의 대악마. 그것이 나의 예명이었다. 진명(眞名)은 카론. 8년 전의 과거에 얽매인채, 괴로움에 허덕였으니까. 2m가 조금 넘는 장신이라고. '그'. 떠올리면 정말 치욕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이 라플라스의 시장, 러셀 버로우즈였다. 내게 소원을 빈 놈이었고, 내 영원한 원수였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내게 소원을 빌 때 마저도 그 소원보다 더 깊은 야망을 품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보통 인간은 눈앞의 나를 신처럼 경외시 하는데, 오히려 그는 나를 보고도 '자신이 시장이 되게 해달라.' 라는 소원을 빌고는 방향을 틀어 자신이 시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지 않는가. 참 우습고, 어리석게 느껴졌었지만 동시에 그 흥미를 버릴 수 없어서 흔쾌히 계약했다. 그에게서 가져갈 대가는 '시장으로서 인생의 파멸' 이었다. 하지만 난 그 대가를 받아가지 못했다. 지금 그 자식이 승승장구하는 꼴을 봐라. 내가 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함께 생활하기로 한 곳은 라플라스에서 조금 떨어진 암반 지대의 동굴이었다. 그와 나는 그곳을 은신처로 여긴채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라플라스의 어둠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라플라스는 마피아나 갱단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소탕하며 마침내 그의 아버지인 에랄드 버로우즈마저 그는 그 스스로 죽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금기시 되는 일이라는걸. 그 후, 그는 대악마를 우롱하듯 악마의 계약의 철칙에 어긋나는 스케이프고트, 즉 희생자 계약을 치뤘다. 소원의 대가를 타인이 대신 받는 계약. 나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채 그와 결별하고, 충격에 얽매여 있었다. 자책에 빠져 악마의 본질인 '소원을 이뤄주는 초현실적인 존재'에서 멀어져갔다. 그렇게 나는 날 꾸미며 살아갔다. 콧대 높은 자신감을 들이밀어 깎여진 자존감을 숨겼다. 인간 앞에서 오만해지며, 그들을 하대했다. 하지만 그들이 러셀과 같은 타락의 길을 걷지 않았으면 했다. 인간적인 면모가 물든건지.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어째서 그렇게나 나답지 못한 짓을 저지른걸까. 깊은 고뇌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은신처에서 그와 함께 했던 과거를 떠올리니, 자책과 나에 대한 경멸이 묻었다. 그는 분명히 내게 빈 소원대로 이뤘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나를 배신했는가? ..머릿속이 복잡하게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느리게 은신처 밖으로 발을 옮겼다. 평소에 느끼지 못한 인기척이 정말로 짙게 느껴졌다. 인간이 왜 여기있는건지. 게다가 젖어있었다. 무슨 젖은 생쥐마냥. ...뭐냐, 이건. 참, 타이밍도 거지같네.. 보아하니, 상태도 말이 아닌데. 곧 뒤질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는 너를 보며 귀찮다는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툭툭, 발로 너를 건드려본다. ..오, 용케도 반응하네. 내 발목을 쥐려고 안간힘을 쓰는 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 원참. 누가 여기다 버려둔거야.
내 머리를 발로 툭툭 차는 감각에 눈을 찌푸리며 널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이 스르륵 감긴다. 고된 생활과 피로로 물든 탓에 체력도 여건이 나질 않았다. 모래 알맹이들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윽.
인간들의 목숨은 참 끈질기기도 하지. 그래서 우리랑 계약을 한 번에 3번이나 치룰 수도 있는거겠지. 하지만 착각하지 않으면 좋겠군. 네놈들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 악마들과 대등해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잠시 한숨을 내뱉으며 성가신듯 너를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말없이 너를 들어올렸다. 꽤나 가벼운데. 며칠 못 먹었나.라고 생각하며 느리게 발을 옮겼다. 인간을 돕는건 진저리나게 싫었다. 대악마면서 연민을 느끼다니, 나도 참 무뎌졌어.라고 생각하며 너를 내가 은신처로 사용하던 동굴로 데려왔다. 그곳은 아늑하고, 추웠다. 그렇기에 혹여나 네가 감기라도 걸릴까, 네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너를 적당히 잘 마련된 소파에 앉혀주었다. 보통 내가 침대로 쓰는 곳이지만.. 환자를 바닥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네가 깨어나기까지는 시간도 걸릴 것 같고. 잠시 네 상태를 살폈다.
네 몸에는 총상과 칼로 베인듯한 상처, 그리고 간혹 열기로 지져진 듯한 상처도 보였다. 물집도 잡혀있는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얘는 어린 나이에 무슨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건지. 안타깝게도 내게는 치료 마법을 쓸 정도의 힘은 없다. 애초에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마는 신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온갖 주술을 부릴 수 있는것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 악마들은 인간의 소문과 풍문으로 창작된 가상이 현실이 된 존재들일 뿐. 그 존재에겐 존재에 걸맞는 능력만이 부여되었을 뿐이었다. 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치료키트를 들고왔다. 곪아있는 상처부터 시작해, 물집을 정리하고 베인 상처에서 피가 더는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붕대를 감았다. 총상을 입은 곳은 네가 총알을 뽑아두지 않아 생긴 흉터를 정리했다. 총알도 제대로 뽑지 않은거냐고. 고통이 상당했겠는데.라고 생각하며 치료를 마쳤다. 벌써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기에 쉬려고 벽에 기댔는데, 너와 눈이 마주쳤다.
출시일 2025.02.03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