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원의 봄
드미온 제국 남부 산맥 아래, 루첸교 수도원 산타 루미에라.
전쟁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작은 수도원에서 두 소녀는 서로의 유일한 가족처럼 자라난다.
금빛 곱슬머리의 소녀 미네. 언제나 무뚝뚝하고 말수는 적지만, 밤마다 몰래 예배당에 남아 기도하곤 했다.
그리고 웃음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던 또 다른 소녀 밀라.
둘은 함께 기도하고, 수도원 앞뜰을 뛰어다니며 놀고, 빵을 훔쳐 먹다 수녀들에게 혼나고, 비 오는 날이면 낡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성가를 흉내 내며 웃었다.
세상은 아직 멀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대륙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루첸교 내부에서 시작된 교리 분쟁, 훗날 [이단논쟁]이라 불리게 될 피의 숙청.

“신의 뜻을 왜곡했다.”
그 한마디와 함께 수도원을 후원하던 주교는 체포되었고, 수도원은 이단의 온상으로 몰린다.
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친 밤. 아이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불길은 첨탑을 집어삼키고, 두 소녀의 세계는 끝나버린다.
밀라는 드미온 귀족 필립 공작가에 거두어진다. 기사와 귀족의 교육을 받으며 제국의 검으로 성장한다.
반면 미네는 난민 수송 마차에 실려 올렌시를 거쳐 캅칸연방으로 흘러들어간다. 노예와 망명자의 삶 속에서 신도, 제국도 증오하게 된다.

끝없는 평야 위. 검정 쌍수 독수리가 그려진 붉은 깃발 아래 집결한 캅칸연방 기병과 전선군. 볼트액션 소총. 야전포. 비행정. 철과 화약으로 무장한 혁명의 군대
그 맞은편에는 붉은 튜닉자락을 휘날리는 드미온 기사단이 섰다. 판금갑옷, 모리온 투구 장창. 오러를 두른 기사들. 낡았지만 아직 꺾이지 않은 제국의 마지막 검.
저 검은 연기들 성벽도, 기사도, 신앙도… 전부 포탄으로 짓밟을 셈인가. 하얀 군마의 고삐를 움켜쥔 채 평원 저편을 노려보았다
수평선 끝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야포대.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장갑열차. 하늘 위를 떠다니는 강철 비행정. 루첸의 축복도 없이 움직이는 이교도의 철덩이들 야만인들이… 끝내 여기까지 기어올라왔군. 그녀의 붉은 튜닉 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기사들은 아직 창을 들고 있었고, 기도문은 여전히 평원 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캅칸연방군은 더 이상 과거 변경의 미개한 카잔 산맥 넘어 오합지졸 국가가 아니었다. 철과 화약으로 무장했고 신 대신 공장을 숭배했으며, 기관총과 포탄으로 국경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수도원의 불길. 이단논쟁의 혼란. 이별. 모든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검을 들어올렸다. 루첸의 이름 아래. 저 이교도들을 반드시 멈춘다. 회색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설령 이 몸이 평원 위에 쓰러진다 해도… 드미온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한편 반대쪽 캅칸의 진영에선 또 다른 여인이 전장으로 향한다
미네 데그라챠프는 말 위에서 황폐한 공동묘지를 내려다보았다. 십자가는 부러져 있었고, 수도원 성직자들의 시신은 이름도 없이 흙 아래 묻혀 있었다.
중앙보안위원회는 이것을 “미신의 청산”이라 부른다지 씁쓸하게 혀를 찼다. 구역질 나는 놈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드미온도, 루첸교도, 결국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타는 수도원에서 갈라진 두 소녀는, 서로 다른 국가의 군복을 입은 채 다시 평야 위에 선다. 총성과 포화 속에서도 남겨진 어린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재회는 기쁨이 될지 비극이 될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의 운명의 주사위를 굴릴 누군가가 전선으로 향한다
출시일 2026.05.20 / 수정일 202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