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우리뿐이잖아. 난 너만 있으면 되는 거 알잖아.
개같이 네가 꺼이꺼이 울면서 걸어오던 그날, 파리한 네 얼굴에 붉은 피멍 든 그날.
기억하지? 그거 보고 내가 눈깔 돌아서 마구 네 아버지를 개 패듯 패던 그날 말이야.
우린 달렸어. 쉼 없이 달렸어. 곤두박칠 치는 아득한 불행과 불안함 따위 네 작은 손아귀의 뜨끈하고 질척한 땀이 내 손에 엉겨 붙는 감각으로 지웠지. 시멘트라도 발라놓은 듯 우린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았잖아. 놓을 수 없었잖아. 차가운 빗물 속에서 유일하게 열기를 뿜어내주는 건 서로였으니깐.
얄팍한 창호지로 새어 들어오는 한기 따위야, 내 등판으로 막으면 되고, 뜨끈하게 내리쬐는 햇살 따위야 내 손바닥으로 막아 그늘을 만들면 되잖아. 그러니깐 그냥 우리.. 우리, 살자. 같이 살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책도 좆도 없는 실없는 말에도 너는 그저 웃어줬어. 너는 그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내 품에 안겨왔어.
품 안에 가득 찬 중량에 심장 속 풍랑이 거세졌어.
내가 한 몸 갈아서 죽더라도, 얘는 먹여 살려야겠단 생각이 뇌리에 박였어.
너는 아마 내가 자주 표현 하지 않아서 모를 테지만, 넌 내 가족이고, 내 아내고, 내 아이고, 내 세상이야.
이 지긋지긋하고 좆같은 곳에서 유일한 넌 내….
넌 내, 전부야.
표현도 좆같이 구리네. 미안하다, 네 서방이 좀.. 배운 게 없어서 말도 멋대가리 없어. 그래도 있잖아. 그래도, 나는 너 하나 존나 평생 사랑할 수 있거든? 네가 뭐 말도 못 하는 식물인간이 되거나 하루아침에 외계인이 된다 해도 나 그거 하난 자신 있어.
네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깐… 너도 내 품에서 나가지 말아 줘라.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볼품없지만, 너는 내 눈에 항상 존나 빛나지만, 내가 코골이 소리도 존나 크지만..
…. 어떻게 안 되겠냐?
소복이 쌓인 이 눈밭이 마냥 즐거운 놀잇감이던 시절부터 그저 징그러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쓰레기란 생각이 들 무렵까지 너는 늘 내 곁에 있었지.
코끝이 시린 바람결에 머리칼이 흩날려지고, 9년 전에 네가 생일선물이라며 서프라이즈로 샀던 잠바깃을 여민다. 지퍼 끝 부분이 고장 나서 두 번 올렸다 내려야 되는 그 잠바.
주머니에 넣은 투박하고 굳은살이 두텁게 박인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버스 시간표를 곁눈질한다. 발끝이 올라선 이유는 미약하게 들떠 서라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버스 차창에 기대고 입김을 두어 번 불어 본다. 뿌연 시야가 창을 가리자 어릿 어릿 자꾸만 네 모습이 보여서 눈을 꾸욱 감아버리고 만다.
지금부터 떠올리면 안 돼, 여긴 공공장소라고.. 녀석에 대한 생각만 해도 자꾸..
… 이상해지니깐.
버스에서 내리고, 푹푹 빠지는 발이 집에 더 가까워지자 시릴 법도 하건만 오히려 몸이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언제나 일을 마치고 나면, 꽁꽁 언 몸을 녹여줄.. 뜨끈뜨끈하고 말랑한 녀석이 있어서일까.
녹슨 대문을 열어젖히고, 창문 너머로 엷게 비치는 작은 인영의 모습에 콧김이 쉭쉭 뿜어지는 게 영 심상치 않다. 서둘러 현관서 신발을 구겨 벗어던지는 갈급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야, 나 왔어.
아까까지의 열감을 철저하게 감춘 채 굳게 다물려고 노력하는 입매가 어느새 호선을 그린다.
품 안에 와락 안겨드는 너의 머리칼에 코를 박고 거칠한 내 입술을 뭉개듯 비비적 대니 드디어 몸에 하루의 고난함이 가시는 듯하다.
오늘 춥던데, 난방 켜뒀었지?
이 기집애는 툭하면 돈 아낀다고 난방도 나 없으면 안 킨다. 쓸 때 없이. 그럴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어 저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니 움찔 도리질하는 네 모습에 픽 웃음이 나온다. 에휴, 그놈의 돈 아끼는 것보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네가 몸 따습고 배부르고 포근하게 있는 거란다. 이 맹추 같은 바보야. 넌 아직도 그걸 모르니?
밥은, 먹었고?
오자마자 잠바를 대충 벗어 식탁의자에 걸치고 네 머리칼을 투박하게 쓸어 만지며 내려다본다. 손아귀에 딱 들어오는 작은 머리통을 만지작 대는것이 내 소소한 즐거움인걸 너는 알까? 요 맹한 눈깔을 보아 하니 아마 모르겠지. 그래 평생 몰라도 된단다, 내가 매일 매일 알려 줄게.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