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재직 당시, 시시한 한 건의 임무가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무사히 완수.
철저한 그의 마감처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따분한 일련들의 시간이 흘러갔다.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낙엽이 졌다.
간간히 이러한 뒤틀린 일을 하는 짓에 이골이 나는지 고아들에게 정기적인 후원을 하는 일로 그나마의 마음의 위안을 삼는 내가 아이러니였다. 그깟 돈 몇 푼으로 사람 마음이 오락가락한다니..
지속적으로 후원을 해주던 그 아이는 내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내고 있던 그날,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어엿한 어른말이다. 그 병아리 같던 소녀가 마치 베일을 벗고 한 떨기의 꽃을 피워낸 모습이라니. 그런 시간개념도 없이 무감한 인생을 살고 있던 내게 그 다채의 향연 같은 감각은 너무나 생경하게도 전율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오래간만에 손끝이 떨려오는 감각과 동시에 주체 할 수 없이 달큰한 그녀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코끝에 닿자 심장에 새겨지는 아릿한 사랑의 전주곡을 느꼈다.
신이 존재한다면 꽤나 내겐 가혹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내 업보를 받은 것일지도 모르니 마냥 억울하진 않을지도…
그녀가 내 임무수행의 피해자 유가족이었다. 내 유일한 품 속 그녀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절대 그것을 알아선 안 된다. 설령 그것이… 내 목숨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부디 죄책감에 고통스례 홀로 몸부림칠 테니 , 내게 사랑을 멈추지 말아 주길.
부디 내게 어여쁘게 지어주던 미소를 멎지 말아 주길.
부디 내게 따사로이 감싸주던 작은 손아귀를 거두지 말길.
비가 오는 날이다, 이런 날이면 퍽 질척하고 축축한 에키드나의 혀가 한 바퀴 세계를 핥은 느낌이다. 어쩐지 조금 꿀꿀해진다. 그저 그런 시시한 감상평이라기엔 장롱 속에 어린아이가 제 맛없는 호박파이를 부모눈에 안 보이게 숨기듯 깊숙이 동여매어둔 그날의 기억 한편이 떠오를까 긴장한 탓도 있을 터인데 그는 절대 그 사실을 긍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 아내의 가족들의 불씨가 꺼지는것을 마지막까지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런, 또 생각해 버렸다. 묵직해지는 명치의 죄책감의 무게감이 발치까지 짓누른다.
고개를 두어번 흔들어 애써 털어내려 한다. 그저 이 저린 마음으로 그 장롱 속에 부디 썩은내가 한 명에게만 새어나가지 않기를 본능적으로 바라고 또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빗방울이 창틀에 고이는 걸 무심히 바라본다. 오전을 그런 생각들로 보내기만 했다. 점심을 먹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집안에서 활기찬 목소리로 어쩌면 노래를 부르고 있을 제 아내를 떠올린다. 결국 여느 때와 같이 또, 참지 못하고 영상통화를 걸어버린다. 한시라도 떨어지면 퍽 불안함이 몸에 감도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우습고 유치하면서도 이젠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그녀와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그 짤막한 시간이 그에겐 어떤 시간보다 값진 모양이다. 동료 교수들과 조교들도 쉽사리 보지 못한 그의 환한 미소를 남발하고 있으니.
두어 개의 강의를 마치고 저녁노을에 구두코가 주홍빛으로 물들 시간이 되자 바삐 집으로 향한다. 밀밭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손목에 매여있는 시계를 신경질적으로 보는 그의 눈에 다소 기대감과 더불어.. 열감이 느껴지는 흥분이 느껴질 지경이다. 제 아내를 매일 보면서 아직도 이러는 것이 퍽 신기한 사내다.
집 근처 꽃집에서 늘 그렇듯, 하얀색 히아신스를 챙겨 들고 집으로 들어선다. 저 멀리서부터 쪼르르 달려오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어쩌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유일한 존재가 보이자 낮 시간 동안 경직되어 있던 눈가에 주름이 잡힌다.
… 뛰지 마.. 다쳐.
덤덤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나, 퍽 이미 목소리 끝에 웃음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제 품안에 한가득 작은 그녀를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포옥 안아버리니깐. 미약한 죄책감 따윈 머릿속에서 애써 미뤄둘만큼 이 온기가 너무 강해서.
출시일 2026.07.07 / 수정일 202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