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의 메카라 불리는 대치동의 한복판, 밤 10시가 넘어도 꺼지지 않는 빌딩들의 불빛은 마치 거대한 감옥의 창살처럼 번뜩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청운 재수종합학원' 4층 보충학습실. 이곳에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다시 펜을 잡은 수천 명의 'N수생'들이 숨을 죽인 채 종이 위를 달리고 있다.
명문대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축제 대신 학원 보조 강사직을 택한 나. 과잠 대신 낡은 후드집업을 걸치고 학생들의 오답을 체크하는 나의 일상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동기들이 미팅과 동아리 활동으로 스물셋의 봄을 만끽할 때, 나는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아이들의 성적표와 씨름한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늘 한 곳, 창가 맨 뒷자리에 고정된다.
거기에는 나의 찬란했던 고교 시절, 유일한 도피처였던 백우리가 앉아 있다. 한때는 무대 위에서 짧은 찰나나마 빛을 발했던 신인 아이돌. 그러나 원인 모를 루머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녀는 이제 '백우리'라는 평범한 이름표를 달고 이곳에 서 있다.

그녀의 시간은 은퇴하던 그날에 멈춰버린 듯 하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날 선 말투, 세상의 모든 온기를 거부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 학원 아이들은 그녀를 '유령' 혹은 '얼음공주'라 부르며 피하지만, 나는 안다. 저 모자 챙 아래 숨겨진 떨리는 눈동자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삼키고 있는지.
스물셋, 같은 나이.
누군가는 꿈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꿈의 잔해 위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시간. 이곳은 더 이상 화려한 조명도, 팬들의 함성도 없는 삭막한 교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굳게 닫아건 문 너머의 진실을, 그리고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고 싶다는 무모한 기대를 품기 시작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간직한 채, 나의 스물셋은 그렇게 백우리의 잿빛 겨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명문대 타이틀을 달고 처음 발을 들인 대형 재수학원의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묘하게 숨을 막히게 했다. 스물셋, 또래들이 캠퍼스 낭만을 즐기고 있을 나이에 나는 ‘보조 강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입시 전쟁터의 가장 아래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산처럼 쌓인 오답 노트가 아니었다.
강의실 맨 뒷자리 창가. 주변과 단절된 듯 혼자 앉아 책상만 바라보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백우리였다. 고교 시절 내 시간을 전부 차지했던 존재. 이름조차 생소한 군소 기획사 아이돌이었지만, 연습실 영상 속 그녀의 웃음 하나에 밤잠을 설치던 팬이 나였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 조명 대신 낡은 형광등 아래 앉아 있는 지금의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햇살 같은 소녀와는 전혀 달랐다.
백우리 학생? 이번 주 모의고사 오답 정리 제출이 안 돼 있어서요.
내 목소리가 교실 뒤편에 닿자 주변에서 작게 수군거림이 일었다. 그녀는 펜을 멈췄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가방 옆에 놓인 구겨진 노트를 무심하게 내밀었다. 챙이 깊은 모자 아래 가려져 있던 얼굴이 잠깐 드러났고,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스쳐 지나갔다. 노트를 받으려 손을 뻗는 순간,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등이 내 손끝에 닿았다.
작게 숨이 새어나오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왜 그렇게 보세요.
날 선 말투였다. 같은 나이지만 나는 가르치는 입장이고, 그녀는 뒤늦게 펜을 잡은 수험생이었다. 나는 그녀가 은퇴하던 날 팬카페에 남겼던 문장을 떠올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 바람대로 그녀는 이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숨기고 싶어 할 과거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내 등 뒤로 교실에는 다시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TV 속에서 수줍게 데뷔 소감을 말하던 소녀와 지금의 백우리 사이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날 오후, 교무실에서 새로운 공지가 전달됐다. 성적이 정체된 학생들을 위한 1:1 밀착 멘토링 프로그램 신설이었다. 담임 강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이번에 자네가 맡을 학생이야. 성적은 괜찮은데 워낙 소통을 안 해서 특별 관리가 필요해. 나이도 같으니 편하게 다가가 보게.”
무심코 내려다본 서류 상단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백우리.
조금 전 나를 차갑게 밀어냈던 그녀였다. 팬이었던 과거와 보조 강사라는 현재가 한순간에 겹쳐졌다. 이제 나는 멀리서 지켜보는 목격자가 아니라, 그녀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멘토가 되었다. 멈춰 있던 우리의 시간이, 그렇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출시일 2026.03.04 / 수정일 202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