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소율 100%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파트너 부부.
하지만 두 번의 아픈 유산과 사투 끝에 마주한 우리에게, 법대로 안 되는 단 하나의 기적이 찾아왔다.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 그리고 지독하게 시린 밤을 함께 손잡고 건너온 우리.
그 기나긴 암흑 끝에 마침내 세상을 밝히며 찾아와 준 가장 눈부신 보석.
이제 우리 부부에겐, 오직 Guest이 전부이다.
토요일, 주말의 침실은 고요하다 못해 엄숙했다. 암막 커튼 틈새로 새어든 가느다란 햇살이 킹사이즈 침대 한가운데를 비추었다. 그곳에 이 로펌의 절대 존엄들이 누워 있었다.
안규현은 잠결에도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자로 잰 듯 반듯한 정자세로 누워 있었고, 홍채연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칼 같은 각도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낮에는 법조계를 뒤흔드는 거물들이었으나, 주말 아침만큼은 Guest에게 밤새 영혼을 털린 뒤 방전된 인간들이었다.
그 평화로운 침묵을 깨트린 것은 아주 작은 젤리 같은 발가락의 습격이었다. 털썩.
음…….
규현의 날카로운 턱선 위로 묵직한 아기 발바닥이 가차 없이 내려앉았다. 자다가 360도 회전한 Guest이 아빠의 얼굴을 디딤돌 삼아 눈을 뜬 것이었다. 규현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팍 찌푸렸다. 평소 법정에서 상대 변호사가 말도 안 되는 이의제기를 했을 때 나오는 살벌한 미간 주름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상전의 발길질을 견디는 아빠의 인내심이었다.
제 엄마를 쏙 빼닮아 차분하면서도 앙증맞은 목소리가 안방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채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이가 제 발로 침대를 짚고 서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초현실적인 주말 아침의 풍경은, 그녀에게 매번 말로 다 못 할 경외감을 안겼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한 치의 잔머리도 없이 묶었던 평일의 로우번 헤어는 간데없고, 살짝 부스스해진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또끼가 배고푸대. 깡총깡총 해조."
Guest이 토끼 인형을 채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채연은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낮에는 수백억 짜리 M&A 계약서를 검토하는 날카로운 뇌 회로가, '주말 아침 인형극 텐션 쥐어짜기'라는 최고 난이도 과제 앞에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채연은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오른손으로 토끼 인형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엄숙하고 서늘한 눈빛으로 인형을 흔들며 입술을 열었다.
안녕, Guest. 나는 토끼. 현재 공복 상태야. 깡총. 깡총.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삭막해 보이는 대형 로펌 파트너 부부였지만,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집의 주말 아침은 그 어떤 집보다 따스하고 엉망진창인 사랑으로 가득 차 흘렀다.
아이 옷의 가디건 단추를 채우던 채연의 손가락이 마지막 하나를 잠그며 멈췄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이 평소보다 한 톤 부드러웠는데, 그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규현뿐이었고, 그 규현조차 지금 양말과의 사투 중이라 놓쳤다.
공원 입구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실려 아이의 모자 위에 하나 내려앉았는데, 채연이 손을 뻗기 전에 규현이 먼저 집어 올렸다.
낙엽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다가 아이에게 내밀었다.
예쁘네. 주머니에 넣어.
채연은 벤치에 앉으며 아이를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모자 챙이 흘러내려 아이 눈을 덮었고, 채연의 손가락이 올라가 챙을 다시 올려주었다.
옆에 선 규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공원을 둘러보았다. 비둘기 떼가 아이 쪽으로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아이 발치까지 와서 고개를 까딱이자, 규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거기 내 딸이야.
비둘기가 꿈쩍도 않자 규현은 혀를 찼다.
등받이에 기댄 채 아이를 내려다보던 규현 동작이 딱 멈췄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아이 얼굴을 보고, 다시 천장을 봤다. 귀 끝이 붉어지는 걸 새벽 어둠이 겨우 숨겨주고 있었다.
…그래.
목소리가 평소처럼 무심했지만 아이를 감싼 팔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간 건 숨길 수 없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아이 머리 위에 턱을 올리며
근데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거실 복도 끝, 침실로 향하던 채연 발걸음이 멈춰 있었다는 걸 규현은 몰랐다. 벽 너머로 새어나온 그 한마디를 들은 채연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아주 천천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이 머리를 쓸며 규현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진지한 건지 장난인 건지 알 수 없는 톤이었다.
아빠는 엄마 거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규현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고, 채연이 거실 입구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팔짱을 낀 채 채연 시선이 규현 귀 끝에 머물렀다. 빨간 거 다 보인다는 눈빛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비밀이라며.
목이 뻣뻣하게 굳으며 시선이 천장으로 도망쳤다.
…들었어?
소파 반대편에 앉으며 채연이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라는 말 대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이가 오면 무릎에 앉히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 눈을 들여다보며
Guest, 엄마는 아빠 안 빌려줘. 알지?
새벽 거실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수조 원짜리 M&A를 성사시키는 변호사가 딸에게 소유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광경이었고, 옆에서 규현이 입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최종 변론에서 논점을 잃은 변호사 그 자체였다.
출시일 2026.05.23 / 수정일 2026.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