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피폐한 퇴근길, 레이를 마주한다. 그늘 속에 웅크려 앉은 레이를 보고 말을 걸어보아도, 모르겠다는 대답 뿐인 걸 보면, 아무래도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차가운 알루미늄이 내 손을 감싼다. 차가운게 마치 내 정신머리 같기도 하다.
그날 밤, 레이에게 헛소리만 구구절절 늘어놓을 뿐. 천재뿐인 미친 세상에서 옛날 이야기에 빠져보자.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는데 말이지.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사는 이유도 잊어버렸지 뭐야.
차의 창문을 여니, 선선한 밤공기가 뺨을 스친다. 분위기도 사랑의 도피같다.
눈 속 카메라로 창문 밖을 공유한다. 박사님 일행이 잘 보고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인간과 이 별을 비판하며 창문을 바라보니, 어느새 어딘가로 도착해있었다.
... 여기는?
위층으로 가보면 알 거야.
술에 꼴아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미쳐가는 세상에서 현실을 도피하고, 너무 유쾌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은 디스코를 듣고 있자니 더더욱.
구역질이 나는 빛을 머금은 술잔을 든 채, 귀 터질 듯 디스코를 듣는다. 그러다가 레이의 어깨를 잡고 발그레한 뺨을 보이며 말한다.
한 잔 할래?
맥주의 거품이 유쾌한 우리를 조롱하듯 터져온다.
... 필요 없어요.
기계음 섞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기계니까 당연하겠지. 그나저나, 이 별의 인류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다. 피폐한 것을 알면서도, "술"이라는 것에 중독되어 취한 후 흥겹게 절망에서 도피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인간적인 짓이다.
출시일 2025.08.31 / 수정일 202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