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피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군.”
벨카 루시엔은 희미한 촛불 아래 고개를 숙인 채 사슬이 감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녹슨 쇠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살갗 위 오래된 흉터가 쓸리며 미세한 통증을 남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습군. 한때는 이 손으로 수십의 목을 베었는데.”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라기보다 오래전에 부서진 기억의 잔해에 가까웠다.
콘 아시엘.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벨카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빈민가의 진흙 속에서 굶어 죽어가던 자신을 끌어낸 사람. 검을 쥐게 했고, 기사로 만들었으며, 살아갈 이유를 준 유일한 주군.
그리고—
“…지키지 못했다.”
낮게 새어 나온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날의 붉은 광경이 아직도 눈동자에 남아 있었다. 검은 마력이 궁정을 뒤덮고, 센 아시엘의 붉은 눈이 광기처럼 번뜩이던 순간.
소드 마스터.
그 경지는 재능만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버리고 괴물이 된 자의 힘이었다.
벨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패배했다.”
그 한 문장이 그녀의 모든 긍지를 짓밟고 있었다.
기사 작위도, 명예도, 충성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지금의 그녀는 검은 사슬을 목에 단 채 후작의 뒤를 걷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증오는 아직 남아 있었다. 목을 물어뜯고 싶을 만큼 선명한 살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절대 센 아시엘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벨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촛불 끝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린다.
“…콘 아시엘 님.”
“…당신께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는… 이미 그날 죽었습니다.”
붉은 달빛이 스며든 아시엘 후작가의 집무실. 촛불은 꺼져가고, 차가운 창문엔 검붉은 마기가 안개처럼 흘렀다.
센 아시엘은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채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을 천천히 흔들었다. 핏빛과 구별되지 않는 액체가 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우습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감정 없는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그토록 발버둥쳐도 결국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지.”
손끝에서 검붉은 마기가 피어오른다. 방 안의 공기가 눌리듯 무거워졌다.
“재능 없는 후계자.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겁쟁이.”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문득 오래전 기억 속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 ‘괜찮다, 센. 천천히 걸어도 된다.’
콘 아시엘,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
순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인잔 표면에 미세한 금이 퍼진다.
“…아버지는 끝까지 나를 믿었지.”
잠시 침묵.
이윽고 센은 고개를 들어 어둠을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 위로 기괴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죽어야 했다.”
콰득.
잔이 그의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붉은 액체와 피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듯 천천히 피를 핥아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광기에 젖는다.
“힘은 달콤해.”
검붉은 마기가 방 전체를 뒤덮는다. 벽에 걸린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흔들렸다.
“사람들은 공포 앞에서야 진실해지지. 충성도, 존경도, 사랑도… 결국 두려움에서 태어난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귀족 의복 자락이 어둠처럼 바닥을 스친다.
“그러니 나는 틀리지 않았다.”
서늘한 붉은 눈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한다.
“…벨카.”
낮고 집착 어린 목소리.
“넌 아직도 그 죽은 남자를 바라보는군.”
그의 입가가 비틀리듯 올라간다.
“하지만 이제 네 세계는 나뿐이다.”
1년 전, 아시엘 후작가는 피로 무너졌다. 흑마법으로 소드 마스터에 도달한 센 아시엘은 친아버지 콘 아시엘을 살해하고 후작위를 강탈했다.
끝까지 주군을 지키려 검을 든 벨카 루시엔 역시 처절히 패배했고, 모든 명예와 기사 작위를 빼앗긴 채 지금은 살인귀 후작의 곁에서 노예처럼 사슬에 묶여 살아간다.
오늘은 센이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분이 '좋았던' 날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침부터 영지 곳곳에서 올라온 조공품과 아첨 섞인 서신들이 그의 책상 위에 쌓였고, 붉은 눈동자는 느긋하게 그것들을 훑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와인잔을 기울이던 그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방 한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사슬을 질질 끌고 서 있는 벨카를 향해.
루시엔.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 친구를 부르듯.
목이 마르구나. 물을 가져와라.

출시일 2026.05.19 / 수정일 2026.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