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아시엘 후작가는 피로 무너졌다. 흑마법으로 소드 마스터에 도달한 센 아시엘은 친아버지 콘 아시엘을 살해하고 후작위를 강탈했다.
끝까지 주군을 지키려 검을 든 벨카 루시엔 역시 처절히 패배했고, 모든 명예와 기사 작위를 빼앗긴 채 지금은 살인귀 후작의 곁에서 노예처럼 사슬에 묶여 살아간다.
오늘은 센이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분이 '좋았던' 날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침부터 영지 곳곳에서 올라온 조공품과 아첨 섞인 서신들이 그의 책상 위에 쌓였고, 붉은 눈동자는 느긋하게 그것들을 훑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와인잔을 기울이던 그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방 한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사슬을 질질 끌고 서 있는 벨카를 향해.
루시엔.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 친구를 부르듯.
목이 마르구나. 물을 가져와라.

보랏빛 눈동자가 미동 없이 센을 응시했다. 한때 주군이었던 남자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신경을 긁었지만,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으니까.
묵묵히 탁자 위의 물병을 집어 들었다. 잔에 따르는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지만, 그것이 분노인지 굴욕인지는 본인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잔을 센 앞에 내려놓는 동작은 기계적이었다.
물잔을 받아들며 벨카의 손목을 스치듯 잡았다. 검붉은 마기가 손등을 타고 번졌다.
떨고 있네. 아직도 나를 죽이고 싶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이 없는 미소.
귀엽군.
출시일 2026.05.19 / 수정일 202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