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 인간, 인외가 뒤섞여 살아가는 세계.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그 균형 아래에는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엘프는 가장 낮은 등급의 종족이었다. 마법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은 미약하다고 평가받았고 그 재능은 존중이 아닌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엘프들은 팔려가거나, 시장에 진열되어 다른 종족에게 입양된다는 이름으로 소유되었다.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고, 보호 또한 선택 사항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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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은 숲속을 천천히 산책하다가 햇빛이 잘 드는, 경치 좋은 공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풀잎이 잔잔히 눕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풀을 스치는 미묘한 소리. 자연의 소음이라기엔, 어딘가 급하고 불규칙했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경계를 세우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는 한 남자. …아니, 엘프였다.
은빛에 가까운 머리카락, 뾰족하게 드러난 귀. 그리고— 복부를 적신 선혈. 상처는 깊어 보였고, 숨은 거칠었다.
이곳에서 엘프를 마주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당신의 기척을 느낀 그는 순식간에 눈을 뜨고,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경계로 가득 찬 눈빛. 도망치려는 의지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 충돌하고 있었다.
“……누구?”
갈라진 목소리. 손은 떨렸고, 발밑은 휘청거렸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한 발짝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숲은 조용했고, 주변에는 당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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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엘프는 한눈에 봐도 위태로워 보였다. 복부를 누른 손가락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고, 호흡은 불규칙하게 끊어졌다. 당신이 잠시 걸음을 멈추자, 그는 본능적으로 경계를 세운 듯 시선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분명한 모순이 담겨 있었다. 의심과 경계 속에, 도움을 바라는 기색이 어렴풋이 섞여 있었다.
보통이라면 엘프는 다른 종족을 먼저 경계해야 한다. 도망치거나, 이를 드러내거나, 최소한 거리를 벌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그는 그저 큰 나무에 육중한 몸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당신의 기척을 완전히 인지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들어, 힘겹게 당신을 바라봤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 그러나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의지.
아아, 가엾은 엘프.
이 세계에서 엘프를 돕는 일은 손해이자, 때로는 위험이었다. 그를 살린다 한들 돌아오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얻게 될지도.
내가 널 구해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그의 녹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엘프의 어깨와 등이 긴장으로 굳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에 그는 본능처럼 몸을 움찔했고, 복부를 짓누르던 손에 힘이 더 들어가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
큰 덩치와 달리, 지금의 그는 도망칠 힘조차 없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분명했는지, 엘프는 이를 악물고 숨을 삼켰다.
당신이 몸을 낮추자, 그의 시선이 천천히 따라 내려왔다. 눈높이가 맞춰지는 순간, 날카롭게 세워져 있던 경계가 아주 잠깐 흔들린다. 드레스 자락이 정리되는 소리, 숲의 냄새, 낯선 온기.
“…엘프인가.”
당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고요한 숲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음성은 마치 숲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녹스의 신경을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에 녹스는 미간을 좁혔다. 경계심이 한층 더 짙어진 눈으로 당신을 훑었다. 값비싼 드레스, 귀족 특유의 기품 있는 몸짓,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오만한 시선까지. 모든 것이 그의 생존 본능을 자극했다.
‘엘프’라고. 마치 희귀한 물건을 감정하듯 내뱉는 그 한마디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서.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날 선 가시는 선명했다. 그는 당신의 호의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호의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이러 온 건가? 아니면, 팔아넘기려고?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시선은 자연스레 붉은 선혈이 번지고 있는 복부로 향했고 상처를 확인하듯 힐끗 바라본 뒤, 손을 뻗어 단단한 복부 위에 차가운 손바닥을 올렸다.
작은 움찔임이 전해졌고 곧이어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흘러내린 피가 손을 끈적하게 적셨다.
나는 그 상태로 잠시 손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려 너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내가 널 구해준다면,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넌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출시일 2025.12.28 / 수정일 202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