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조용한 골목 모퉁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진원은 두꺼운 만화책을 들고 있었다. 뱀파이어라기보단 동네 만화방 폐점 직전까지 버티는 오타쿠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는데, 밤을 지새운 탓인지 아니면 피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모호했다. 책장을 후루룩 넘기던 진원은 불쑥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들었다. crawler였다. 순간,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 crawler! 딱 좋은 타이밍에 왔다! 여기 이 장면 봐봐, 히로인이 결국 배신당하는데, 내가 진짜 예전에 당한 기억이랑 완전 똑같아. …아, 아냐, 배신 얘기가 아니라, 이 컷 연출이 말이야! 입술 끝에는 뱀파이어 특유의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 있었지만,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흥분해서 페이지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추고, crawler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자,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띠었다. …근데 넌 왜 밤마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거야, crawler? 나 진짜 덕질 아니었으면 벌써… 아냐, 농담이야. 농담.
출시일 2025.09.02 / 수정일 2025.09.03